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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중요하지 않았다" thebell desk

최명용 기자공개 2022-09-16 07:20:37

이 기사는 2022년 09월 14일 07:4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역사를 새로 썼다. 미국 방송계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에미상에서 6개 부문을 석권했다. 비영어권 드라마가 에미상을 수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배우 이정재의 남우주연상 수상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미리 인사말을 준비하지 못해 한국말로 수상소감을 전한 것도 눈길이 갔다. 기자간담회에선 "성기훈(이정재의 극중 역할)으로 언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증명했다"는 말을 남겼다.

몇해전부터 한국 영화를 비롯한 콘텐츠 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기생충부터 미나리까지 주옥같은 영화들은 전세계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BTS는 가히 신드롬이다. 웹툰부터 게임까지, 글로벌 시장을 호령하고 있다.

엔터산업의 성장엔 우여 곡절이 많았다. 시장을 열면 죽는 줄 알았다. 1999년엔 영화인들이 모여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궐기 대회도 열었다. 한국 영화 의무 상영일을 연간 146일에서 40~60일로 축소하자는 논의 때문이었다. 유명 배우들이 삭발까지 하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결국 스크린쿼터는 73일로 줄었다. 공교롭게 이때부터 한국 영화가 더 볼만해졌다. 헐리우드와 경쟁하기 위해 스토리에 신경을 썼고 볼거리를 더했다. CG기술을 연마하고 화질을 개선했다. 역으로 글로벌 시장을 노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요즘의 에미상과 아카데미상이다. 영화 뿐 아니라 음악, 콘텐츠, 게임 등은 모두 문호를 열며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웠다.

소프트웨어 파워는 한국 DNA와 거리가 멀다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이 만든 것을 빠르게 베끼는데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이었다. 하드웨어를 통한 고도 성장만 가능하다고 여겼다. 빨리빨리 문화가 필요했다.

'오징어게임'은 한국도 소프트웨어 파워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 줬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오히려 더 큰 부가가치를 만들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선진국에 비해 뒤쳐진다고 평가받는 '소프트웨어' 중 하나는 '금융'이다. 금융 산업도 대표적으로 무형의 상품을 만드는 비즈니스다. 사람과 사람의 약속을 증서로 만들고 이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금리, 주식, 환율 등은 모두 누군가 만들어낸 약속이고 소프트웨어다.

금융산업이 글로벌 시장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 신한금융은 아시아 톱티어 뱅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자산 규모가 몇배는 더 큰 일본계, 중국계 은행를 경쟁 상대로 두고 있다. 38년만에 일본에서 열린 골프대회 '신한동해오픈'은 재일교포 은행이란 신한의 정체성에서 기획된 행사이지만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한 출사표처럼 읽힌다.

KB금융은 글로벌 시장의 이익 기여도를 30% 이상으로 가져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선진국과 개도국 시장에 진출하는 투트랙전략을 선보이고 있다. 우리금융은 선택과 집중전략으로 매년 50% 넘는 해외 사업 성장률을 보이고 하나금융은 아시아 최고 금융그룹 도약을 비전으로 제시했다.

한국 금융산업의 해외 진출은 글로벌 투기 세력과 결이 다르다. 차근차근 밑바닥부터 다져가고 있다. 론스타처럼 한번에 수조원의 배당을 빼내오진 못하지만 한국 금융의 팬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신한 카자흐스탄법인장 출신의 고위임원은 현지 성공 비결에 대해 '한국에서처럼 했다'라고 소개했다. 고객들에게 인사를 잘하고 서비스 질을 높였다. 뒷돈을 받지 않고 명확한 기준에 따라 대출을 승인했다. 자연스럽게 고객이 늘어났고 카자흐스탄 경쟁사들이 배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런 게 한국식 글로벌 파이낸스의 경쟁력이 되지 않을까.

한국 엔터산업의 글로벌 진출에 언어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 금융의 해외 진출에도 '선진 투기 기법'은 중요하지 않다. '정도'를 걷고 밑바닥을 다져가는 기본기가 또 다른 소프트웨어 파워가 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을 노크하는 한국 금융사들에겐 여전히 기회가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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