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er Match Up/분리막 3사]후발주자 'K-분리막'의 도전기①[태동]2004년 국산화한 SK, 16년 만에 日 넘어…2021년 재도전 나선 LG
정명섭 기자공개 2023-09-25 09:20:27
[편집자주]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란 사회적 동물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다. 무리마다 존재하는 암묵적 룰이 행위와 가치판단을 지배한다. 기업의 세계는 어떨까. 동일 업종 기업들은 보다 실리적 이유에서 비슷한 행동양식을 공유한다. 사업 양태가 대동소이하니 같은 매크로 이슈에 영향을 받고 고객 풀 역시 겹친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태생부터 지배구조, 투자와 재무전략까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차이를 THE CFO가 들여다본다.
이 기사는 2023년 09월 20일 07:52 THE CFO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분리막은 이차전지를 구성하는 4대 핵심소재 중 하나다. 서로 닿으면 화재 위험이 있는 양극과 음극 간 접촉을 막고 리튬 이온만 통과시켜 전류가 통하도록 한다. 그러나 '안전판'이라는 역할 대비 양극재 등 다른 소재보다 주목도는 크지 않은 편이었다.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약 10%)이 상대적으로 낮은 데다 과거 일본 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해왔다는 점도 일부 영향이 있었다.전기차 산업의 성장으로 이차전지 소재 수요가 급증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국내 이차전지 셀 제조사들이 완성차업체들의 러브콜을 받으면서 같은 밸류체인 선상에 있는 분리막 업체들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SK IET)와 WCP, LG화학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SK IET는 후발주자의 설움을 딛고 기술 개발에 매진해 일본 기업들의 아성을 뛰어 넘었다.
분리막 3사는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발 이차전지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중국산 분리막을 대체할 주역이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오면서 시장의 관심은 더 커지고 있다.
◇2004년 국산화 성공한 SK그룹...기술 혁신으로 日 기업 아성 넘어
국내에서 가장 먼저 이차전지용 분리막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기업은 SK그룹이다. 2004년 SK이노베이션(당시 SK에너지)이 처음 리튬이온전지용 분리막을 독자 기술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전 세계적으로는 세 번째 성과였다. 이듬해 12월에는 충북 청주공장에 분리막 생산공장을 준공하고 상업 생산을 시작했다.
이는 국내 기업이 분리막을 국산화했다는 데 의미가 컸다. 당시 아사히 카세이와 도레이(당시 도넨) 등 일본 2개사가 글로벌 분리막 시장의 약 70%를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국내 기업들은 분리막을 전량 수입해서 쓰던 시기다.
SK이노베이션의 분리막은 초기에 여러 풍파를 겪었다. 2006년 도레이로부터 특허침해소송을 당해 3년여간 법적 다툼(SK이노베이션 최종 승소)을 벌였다. 글로벌 시장에선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한 일본 전자 기업 관계자는 SK이노베이션의 프레젠테이션에 30분 늦게 들어와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는 SK이노베이션이 집요하게 연구개발(R&D)에 매진하는 원동력이 됐다. 2007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축차연신 공법을 개발한 것이 대표적인 성과다. 이는 롤러로 분리막을 위·아래, 좌우로 한 차례씩 늘리는 방법으로 원단 크기를 대폭 늘리면서 두께는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공중에서 분리막 소재를 사방으로 당겨서 기공을 만드는 동시연신공법을 사용했다. 이는 정해진 비율로만 분리막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다. 고객 요구에 맞춰 분리막을 만들기 어렵다는 의미다.
SK이노베이션은 이 기술을 기반으로 공급처를 확대해나갔다. 2000년대 후반 휴대폰 강자 노키아와 계약에 성공하자 일본 파나소닉, 소니 등을 신규 고객사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분리막 생산능력은 매년 20% 이상씩 증가했다. 2010년 증평공장을 준공했고 2012년에는 전기차 이차전지용 분리막을 생산하는 라인도 증설했다.
2018년과 2019년에는 중국 창저우와 폴란드 실롱스크에 법인을 각각 설립해 현지 생산기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후발주자인 SK이노베이션이 일본 업체들의 생산능력을 뛰어넘은 것도 이때부터다. 작년 기준 분리막 생산능력은 15억3000만㎡로 세계 2위다. 국내 분리막 기업 중에선 압도적인 1위다.
SK이노베이션은 2019년 4월 분리막 등 소재 사업을 분사해 SK IET를 출범했다. 이 회사는 2021년 5월 81조원의 증거금을 모으며 화려하게 코스피 시장에 입성했다.
◇LG화학, 2015년 분리막 사업 매각 후 6년 만에 '재도전'
LG그룹은 SK와 달리 분리막 시장에 '재도전'하는 케이스다. LG화학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이차전지 기술을 개발하고 상용화를 추진했던 만큼 분리막 기술개발도 일찍 시작했다. 실제로 LG화학은 분리막에 세라믹 입자와 고분자 바인더를 코팅해 내구성과 내열성을 높이는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안전성이 생명인 자동차 업계에서 이차전지가 본격적으로 쓰일 수 있게 된 계기를 만든 기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LG화학은 분리막을 자체 생산하는 것보다 외부 조달이 사업적으로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했고, 2015년 도레이에 분리막 사업을 300억원에 매각했다. 2015년은 LG화학이 돈이 되지 않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던 시기다. 오창공장의 분리막 설비 등이 매각 대상이었다. 이차전지 시장이 지금처럼 급격히 커질 것이라고 예측하기가 어려웠던 점도 LG화학의 결정에 힘을 실었다.
LG화학이 마음을 바꾼 건 6년 이후인 2021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파트너는 분리막 사업부를 사들인 도레이였다. LG화학은 이미 시장 진출이 늦은 만큼 생산 노하우를 갖춘 기업과 손을 잡는 편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LG화학은 도레이와 끈끈한 협력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두 회사는 분리막 특허도 공동 보유하고 있고 SK이노베이션과의 특허침해 소송전에도 함께 대응하기도 했다. 양사의 합작법인은 지난 5월 헝가리에서 분리막 원단 생산을 시작해 수율 개선 등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북미 지역에 진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두 번의 기회 잡은 WCP, 국내 2위 분리막 기업 발돋움
WCP는 생산능력 기준(연산 8억2000만㎡)으로 국내 2위 분리막 기업으로 2015년 충북 청주에 설립됐다. 삼성전자 출신인 최원근 대표가 2005년 일본에 설립한 더블유스코프(W-SCOPE)가 모회사다. 더블유스코프는 일본 도쿄증권거래소 상장사다.
최 대표는 첫 직장인 삼성전자에서 LCD용 편광필름 국산화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소재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그는 전기차 산업의 성장으로 이차전지용 분리막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보고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최 대표는 일본에서 더블유스코프를 설립한 이후 충북 청주에 부지를 임차해 분리막 샘플을 제작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외 이차전지 제조사들은 무명의 중소기업 분리막을 신뢰하지 않았다.
기회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미국 이차전지 업체 A123시스템이 분리막 개발을 의뢰해왔다. 당시 A123시스템은 미국 분리막 업체인 셀가드의 건식 분리막을 사용했는데, 안정성 개선을 위해 습식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아사히카세이 같은 일본 기업들이 맞춤으로 제작해줄리 없었다.
최 대표는 A123시스템 요구에 맞는 습식 분리막 샘플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는 첫 대규모 공급 계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A123시스템이 경영상의 위기로 중국 완샹그룹에 매각됐다.
두 번째 기회는 국내에 WCP 법인을 설립한 이후인 2019년에 찾아왔다. 당시 WCP는 삼성SDI에 적극적으로 거래를 제안해 공급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LG화학은 일본 도레이와, SK이노베이션은 자체 분리막 개발(SK IET)에 나서 WCP 입장에선 삼성SDI와의 거래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현재 WCP는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삼성SDI로부터 거두고 있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분리막 생산물량의 80% 이상이 삼성SDI향이다.
WCP는 현재 충주공장에서 분리막을 생산하고 있다. 작년에는 헝가리 니레지하저시에 약 7억 유로(9530억원)를 투자해 분리막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올해 내에는 북미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지난해 8월 미국 IRA 시행 이후 SK IET와 WCP, LG화학은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IRA 규정상 미국에서 전기차가 보조금을 받으려면 중국산 분리막을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들이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분리막의 미국 현지 생산이 의무화되는 2029년은 국내 분리막 3사가 고성장하는 기점이 될 전망이다. 실제로 에너지전문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는 한국 분리막 제조사들이 2030년이면 북미 시장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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