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사로잡은 예술]"이중섭 황소, 내 30년과 누군가의 60년을 맞바꾼 그림"안병광 유니온약품그룹 회장 "회색 벽에 그림 한점이 소통의 창구"
서은내 기자공개 2024-02-21 13:40:46
[편집자주]
예술 작품에는 무한한 가치가 녹아있다. 이를 알아본 수많은 자산가, 기업가들의 삶에서도 예술은 따뜻한 벗으로서 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더벨은 성공한 CEO들이 미술품 컬렉터로서 어떻게 미술의 가치를 향유하는지, 그의 경영관, 인생관에 예술품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인터뷰를 통해 풀어봤다.
이 기사는 2024년 02월 15일 17:1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안병광 유니온약품그룹 회장(66)은 스스로 미술품 수집가임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컬렉션을 공개한 보기드문 컬렉터 중 한명이다. 굴지의 제약 유통그룹을 일군 그는 성공한 기업인이자 탁월한 예술적 안목을 겸비한 감성주의 CEO다. 미술계에서는 그를 꼭 한번쯤 만나봐야할 컬렉터로 회자되고 있다.안 회장은 한일약품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서울·대전·인천유니온약품을 비롯 10여개가 넘는 계열사들을 보유한 의약품 유통그룹을 만들어냈다. 기업인으로 그가 걸어온 길 위에 미술은 없어선 안될 벗이자 소통의 통로로 역할을 했다. 좋은 작품 구입에서 파생된 가치를 많은 이들과 공유하겠다는 집념은 '석파정 서울미술관' 설립으로도 이어졌다.
고 이중섭 작가의 <황소>는 안 회장의 삶에 중대한 변곡점을 만들어낸 작품이다. 제약사 영업의 고된 현장에서 미술품 한점은 비즈니스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았다. 나아가 동료와 가족, 사람을 보는 눈까지 바뀌었다. 안 회장은 비즈니스 차원의 만남에서조차 본인을 기업인 누구누구가 아닌 '미술관을 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Q. 눈길을 사로잡은 첫 작품의 매력은 무엇이었나.
A. 1983년 10월 12시쯤 명동 성모병원에서 영업을 하고 나오는데 비가 많이 왔다. 액자집 처마 밑에 서있는데 소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소가 나를 들이받으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시 보니 선한 눈매가 사람 눈이던데, 내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거 같았다. 액자집 문을 열고 들어가 이 그림 얼마냐 물으니 만원이라더라. 깎아서 8000원에 샀다. 주인이 그런데 그건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라고 했다. 진짜를 사려면 어디로 가야되냐고 물었더니 인사동이라고 했다. 아내와 주말에 인사동에 갔는데 이중섭의 황소란 그림인데 고래등 같은 기왓집 한채 값을 내야 살 수 있다더라. 손바닥 두개만한 그림이 그렇게 비싸다는 게 충격이었다. 당시 성북동 기왓집 한채가 1억원이 넘었을거다. 아내에게 꼭 성공해서 원본을 사주겠다고 했다. 쳐다보고 웃더라.
Q. 이중섭의 <황소>를 결국 2010년 서울옥션에서 35억6000만원에 낙찰받았다. 전문 컬렉터도 아닌 개인이 이런 작품을 소유한 배경이 궁금하다.
A. 신문을 보니 그 그림이 35억~55억원 사이에 옥션에 나온다고 하더라. 너무 비쌌다. 이옥경 서울옥션 부회장에게 그 전에 그림을 한두점 산 적이 있었다. 이 부회장에게 이 그림 30년 전부터 마음에 품었던 그림인데 그것 좀 하루만 빌려달라고 했다. 끌어안고 하루 저녁을 잔 뒤 가져다줬다. 경매날이 됐는데 내가 서울에 있으면 사고를 칠 것 같았다. 중외제약에서 당진 수액공장 완공식을 한다더라. 초대받아 갔다.
A. 무조건 살 것 같아 휴대폰도 꺼두고 도망갔다. 밥을 먹을 무렵 전화를 켰더니 그 찰나에 이 부회장에게 연락이 왔다. 그림 안살거냐고 묻길래 안산다고 했다. 또 전화와서 괜찮겠냐고 하는데 괜찮다고 했다. 세번째 전화가 왔는데 도저히 못참고 사기로 한 거다. <황소> 값은 35억원으로 쳤다. 내가 가진 작품 중 이중섭 선생의 <길 떠나는 가족>이 있는데 그걸 20억원으로 쳐주고 추가로 15억원을 더하고 수고비 3억원을 얹어 총 38억원에 사는 걸로 얘기가 됐다. 그렇게 그 작품을 30년만에 집으로 가져왔다. <황소>를 가지고 있던 분은 그 그림을 60년 전부터 소장하다가 그걸로 <길 떠나는 가족>을 샀고, 나는 내가 찾던 <황소>를 30년만에 산 거다. 어떤 이의 60년의 세월과 나의 30년 세월을 서로 맞바꾼 작품이다.
Q. 60년 세월과 30년 세월을 맞바꿨단 게 무슨 말인가.
A. 내게 <황소>를 판 분은 한국전쟁 직후 그 그림을 쌀 한가마니 값으로 원래 <길 떠나는 가족>을 샀다고 한다. 작가들이 가난해 다방에 그림을 맡기고 술이나 밥을 먹던 시절이다. 이중섭 선생이 부산 다방에서 <길 떠나는 가족>을 비롯해 몇점을 내놓고 공동전시를 했었다. 거기서 이분이 <길 떠나는 가족>을 샀는데 이중섭 선생이 찾아와서 <황소>로 바꿔달라고 했다더라. <길 떠나는 가족>은 일본에 있는 아내, 아들을 위해 그린 것이며 가족 인생사를 담은 작품이었다는 거다. <황소>는 한국인의 끈기, 기상을 그린 작품이니 바꾸자고 했다더라. 그림 한점에 인생살이가 있고 삶의 역사가 있다는 걸 그 그림을 통해 배웠다. 60년만에 돌고돌아 그림은 제 주인을 찾은거다. 나는 30년만에 아내에게 약속을 지켰다.
Q. <황소>를 사기 전에도 미술품을 산건가.
A. 1988년에 사업을 시작하고 1991년에 이중섭 그림을 샀는데 담뱃값 은화지에 그린 그림 한점을 500만원 주고 샀다.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살 당시 윗층에 시인 구상 선생이 살았는데 천재 작가 이중섭에 대한 얘기를 워낙 많이 해주셨다. 꼭 한번 그 그림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그게 두 번째였고 첫번째 산 그림은 이남호 화백의 <도석화>다. 내가 모시고 근무하던 소장님에게 20만원 주고 산 그림이었다. 워낙 내가 영업일도 못하고 팀에 기여도 못하니 이거라도 사서 소장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다.
Q. 예술품이 삶에 들어온 후에 인생관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A. 제약 영업은 멀리서 보면 멋있을지 몰라도 현장에서는 갑을병정 중 정이다. 자존심 상하고 속상할 때가 많았다. 마음 속 보이지 않는 울분이 해결 안되니 나쁜 감정이 쌓이더라. 사람을 만나도 계산된 생각만 한다.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내 인생의 회색벽에 그림을 하나 붙이고 나니 그림과 나의 대화 채널이 만들어지고 소통이 되더라. 그림 한점이 친구가 돼 있었다. 내 입장에서 그림을 해석할 수 있다보니 스스로 그림과 대화하게 되고 그 안에서 부정적 감정은 '감성(感性)'으로 바뀌더라. 긍정적이고 감사한 생각이 많아지고 나름의 해답도 찾았다.
Q. 그 변화가 기업가로서의 삶에서 어떤 긍정적 시너지를 일으켰나. 영업 현장에서도 영향이 있었겠다.
A. 기업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른다. 그림이란 소통 창구가 있다보니 그 전쟁도 재밌어졌다. 사람들이 환해진 내얼굴을 보고 나니 대화할때 긍정적인 대화부터 시작하더라.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비즈니스적인 것도 감성적인 대화로 연결됐다. 길병원 이길여 총장님을 7년 전 처음 만났는데 의약품 납품 때문에 뵌 것이나 비즈니스 얘기는 한마디도 안했다. 이 총장님도 박물관을 운영하고 계신다. 미술관 운영하며 기뻤던 얘기 슬펐던 얘기 나누다보니 공통분모가 형성됐다. 세번째 만나서야 뭐하시는 분이냐고 물어보셔서 의약품 유통 얘기를 했다. 문화가 하나의 다리 역할을 해서 업을 발전시키는데에 큰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사업을 끌고가는데에도 윤활유가 됐다.
Q. 그 변화가 가족 구성원, 지인, 인적네트워크에도 영향을 줬겠다.
A. 문화는 사람을 연결해주고 만남의 장을 만들어준다. 유니온약품 회장이 아닌 서울미술관을 하는 안병광으로 수식어가 달라지더라. 다만 내가 미술관 사업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아픔을 주는 부분이 있다. 딸이 미술관 운영을 도와주는데, 고생을 많이 한다. 문화사업은 돈벌이가 안되는 아픈 사업이다. 감성을 다루는 것이지만 실제 그 감성을 만드는 사람들의 애씀이 뒤에 있다.
Q. 미술관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나.
A. 2022년 10주년 기념 전시를 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 전시를 마지막으로 그만두려했다. 미술관 시작할 때 다들 말렸다. 2년 내지 3년만에 사립 미술관은 다 문닫는다. 나는 시작할 때만해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매년 적자였다. 전시 제목을 '두려움일까 아픔일까 사랑일까'로 정하려했다. 미술관에 사람들이 오게 하려면 좋은 작품을 선정해야하는데 이게 다 돈과 연결된다. 감동을 주는 작품은 비쌀 수밖에 없다. 내가 느끼는 미술사업에서의 사랑을 핑계로 아픔과 두려움을 미화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도 그 전시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12만명이 왔다. 2023년 운영도 성공적이었다. 미술관 대관사업도 역할을 했고 기부하는 기업도 있었다. 처음 미술관 오픈할때 나는 이곳을 돈많은 마담들 놀이터로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종로, 서울, 대한민국 누구나 와서 소통하고 정을 나눌 문턱이 낮은 미술관 만들겠다고 했는데 12년 지나서 그게 달성됐다. 12만명 중 85%가 젊은이들이었다. 미술관에 정성을 너무 많이 쏟아서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다.
Q. 미술품에 대한 애호를 색안경 끼고 보는 시선들도 있다. 그럼에도 미술에 대한 진정성을 가지고 문화사업을 공개적으로 이어가는 진정한 애호가라는 말을 들었다. 두렵지는 않은가.
A. 아픔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잘 몰라서 했던거다. 외부에서 오해를 할 수도 있겠으나 내 길을 간다는 생각이다. 내가 만든 정원에서 누군가 쉬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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