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al story]한국 뮤지컬 태동기 이끈 삼성영상사업단1995년 국내 최초 라이선스 작품 <브로드웨이 42번가> 성공, 인재 양성의 산실 역할
이지혜 기자공개 2024-03-19 11:19:22
이 기사는 2024년 03월 15일 14:1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삼성그룹이 한국 대중문화사에 남긴 족적은 크다. 삼성영상사업단의 뮤지컬사업이 대표적이다. <브로드웨이 42번가> 등 외국 제작사와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 대형 작품에 투자하면서 한국 뮤지컬 산업의 태동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영상사업단이 사라진 지 25년이나 흘렀는데도 한국 뮤지컬의 역사를 논할 때마다 거론되는 이유다.유산도 건재하다. 지금 뮤지컬 시장을 이끌고 있는 주역 상당수가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일했거나 자금을 받아 작품을 제작한 경험이 있다. 삼성영상사업단은 어떤 곳이었을까. 지금은 왜 사라졌나.
◇라이선스 공연 정식 수입, 산업 성장의 주춧돌
1995년 삼성전자, 삼성물산, 제일기획 등 계열사에서 소규모로 영위하던 엔터테인먼트 관련 사업을 통합하면서 삼성영상사업단이 출범했다.
고(故) 이건희 회장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했다. 고 이 회장은 “문화적 특성이 강한 나라의 기업은 든든한 부모를 둔 아이와 같다”며 “기업활동이 세계화할수록 문화적 색깔이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된다”며 문화사업을 장려했다. 이에 따라 엔터테인먼트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점찍고 대규모 자금과 인력을 투입했다.
삼성영상사업단이 뮤지컬사업에 나섰다는 점이 눈에 띈다. 삼성영상사업단은 출범 직후 공연제작사 T&S(Time & Space)를 별도로 설립하고 초대 CEO로 설도윤 프로듀서(현 S&Co 프로듀서)를 선임했다. 설 대표는 1993년 삼성영상사업단의 전신인 삼성전자 산하 나이세스 사업팀에 뮤지컬 사업을 제안했는데, 이런 제안이 2년 만에 받아들여진 셈이었다.
당시 한국은 뮤지컬 시장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방송사에서 가끔 소형 뮤지컬을 제작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삼성영상사업단은 뮤지컬 시장의 성장성을 확신했고 설 대표와 함께 작품 제작을 본격화했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1995년 <브로드웨이 42번가>다. 삼성영상사업단은 한국 뮤지컬을 브로드웨이 수준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제작비 28억원을 투입했는데 최종 3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당시 뮤지컬 시장 규모가 20억~30억원 정도였던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외국 제작사에 로열티를 내고 우리 말로 공연한 국내 첫 정식 라이선스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상징성도 컸다.
원종원 순천향대학교 교수 겸 뮤지컬 평론가는 “90년대 초에는 외국 뮤지컬을 무단으로 번역해서 공연하는 게 대다수였다”며 “작품을 왜곡되거나 여러 제작사가 동시에 공연하는 등 각종 해프닝이 벌어졌는데, 삼성영상사업단의 뮤지컬 덕분에 시장에 체계가 잡히면서 산업화가 이뤄질 토대가 생겼다”고 말했다.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성공에 고무된 삼성영상삼업단은 이듬해 해당 공연을 재연하는 동시에 2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두 번째 라이선스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성공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삼성영상사업단이 야심차게 만든 <눈물의 여왕>이 1997년 초연에서 참패했다. 국내 최초 창작 뮤지컬을 표방하며 ‘창작대중가극’이라는 용어까지 정립했지만 흥행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삼성그룹은 위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삼성영상사업단을 접기로 했다. 1999년의 일이었다.
뮤지컬업계 관계자는 “삼성영상사업단은 출범 직후 5년간 2000억원에 가까운 손실을 냈다”며 “그러나 이는 사업 철수에 따른 자산 가치 하락에 따른 것으로 만일 삼성영상사업단이 존속됐다면 시황의 회복에 따라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인재 양성의 산실’, 뮤지컬 산업 인재 대거 배출
비록 삼성영상사업단은 해체됐지만 그 유산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데다 인적 자원까지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 사례가 2001년 초연된 작품 <오페라의 유령>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T&S를 이끌었던 설 대표가 주도해 만든 작품으로 10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됐다. 이는 한국 뮤지컬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관객의 호응도 뜨거웠다. 덕분에 <오페라의 유령>은 흥행 신기록을 경신하며 시장 성장의 마중물이 됐다.
또다른 뮤지컬업계 관계자는 “<브로드웨이 42번가>가 한국 뮤지컬 시장의 성장성을 보여줬기 때문에 막대한 자본을 들여 <오페라의 유령>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영상사업단이 배출한 인재도 뮤지컬 시장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S&Co의 설 프로듀서 외에 신춘수 OD컴퍼니 CEO 겸 한국뮤지컬제작사협회 협회장, 이성훈 쇼노트 CEO가 대표적이다.
신 대표는 설 프로듀서의 권유로 삼성영상사업단의 뮤지컬 제작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신 대표는 영화 감독이 되려던 꿈을 잠시 접어두고 뮤지컬 제작사인 OD컴퍼니를 세웠다. OD컴퍼니는 현재 <위대한 개츠비>로 미국 브로드웨이를 공략할 만큼의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됐다.
이성훈 대표는 삼성전자에 입사해 광소프트사업팀에서 일하다가 삼성영상사업단으로 자리를 옮겨 출범부터 해체까지 함께했다. 이후 CJ그룹에서 일하다가 2018년부터 쇼노트에 합류해 오늘날까지 뮤지컬 제작사업 등을 영위하고 있다.
<쓰릴미>, <스위니토드>, <김종욱찾기> 등 히트작을 만든 해븐의 박용호 프로듀서, 김희철 대구문화예술회관 관장도 삼성영상사업단이 배출한 대표적 인재다. 김 관장은 충무아트센터 본부장, 세종문화회관 문화예술본부장, 국립정동극장 극장장을 거쳤다.
원 교수는 “과거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일했던 인물들이 지금 뮤지컬 시장을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했다”며 “삼성영상사업단이 뮤지컬 산업 인재 양성의 산실로서 기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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