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F, '늦게 빼면 손해' 장부가평가의 두 얼굴 [법인용MMF 진단]③편입자산 손실 우려시 '펀드런'…'시가평가' 칼 빼든 금융당국
이민호 기자공개 2019-06-24 13:32:00
[편집자주]
법인용MMF가 도입된 지 20년이 지난 현재 100조원대 규모로 성장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어온 양적완화 기조를 타고 법인용MMF는 설정규모를 급속도로 불렸다. 이런 법인용MMF는 지난해 카타르 ABCP 사태 이후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법인용MMF의 안정성을 강화하기 위해 국공채 등 안전자산 편입 비중을 일정 부분 의무화하고 분산투자 규제를 이전보다 강하게 적용하기로 했다. 법인용MMF가 성장한 배경과 추후 규제 강화에 따른 영향을 짚어본다.
이 기사는 2019년 06월 18일 07: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금융당국이 법인용 머니마켓펀드(MMF) 기준가 산정에 조건부로 시가평가방식을 도입하겠다고 나섰다. 기존에 적용되고 있던 장부가평가방식이 대규모 환매 사태(펀드런)를 발생시키는 유인으로 작용한다는 판단에서다.법인용MMF는 1999년 대우 회사채 손실 위험을 시작으로 지난해 카타르국립은행(QNB) 정기예금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부실 우려에 이르기까지 특정 자산에서 크레딧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유동성 위기에 직면해왔다.금융당국은 수익자들의 환매 요구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의 안전자산을 법인용MMF에 편입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시가평가방식을 적용해 유동성 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입장이다.
◇장부가평가, 수익자 대량 환매 '유인'
역설적이게도 법인용MMF에서 펀드런이 발생하는 이유는 MMF의 최대 강점으로 꼽히는 장부가 평가 때문이다. MMF는 펀드 중에서는 유일하게 기준가 산정에 시가평가가 아닌 장부가평가를 적용한다. MMF는 편입 자산의 시가괴리율(장부가 대비 시가)이 50bp(0.5%)를 초과하지 않으면 장부가로 반영하도록 허용되고 있다. 애초 법인용MMF에 유입되는 법인자금이 손실을 극도로 기피하는 단기 유휴자금이기 때문에 기준가를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하는 장부가평가는 최대 메리트로 꼽힌다.
하지만 장부가평가는 편입 자산에 부실이 발생할 우려가 시장에 확산될 때 수익자들이 미래의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자금을 미리 인출하려는 유인을 발생시킨다. 시가평가는 편입 자산의 가격 변동을 기준가에 적시에 반영할 수 있어 수익자가 환매 시점을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장부가평가를 적용할 경우 향후 편입 자산에 실제로 부실이 발생해 시가가 급락했을 때에 이르러 자금을 인출하면 손해가 막심하다. 때문에 수익자로서는 실제 부실 발생 전에 현재 장부가로 자금을 미리 빼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장부가평가는 환매 시점에 따라 수익자간 형평성 문제도 야기한다. 이미 편입 자산에 대한 불안이 시장에 확산돼 해당 자산의 매각이 불가능한 경우 유동성 위기가 발생해 수익자들의 환매 요구에도 제때 환매를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같은 시기에 환매를 요구했어도 돈을 늦게 돌려받은 수익자가 피해를 보는 식이다. 법인용MMF 운용사들이 펀드런 발생 때마다 환매 제한 조치를 발동하는 것도 수익자간 형평성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카타르 ABCP 사태 당시 운용사들이 유동성 부족에 직면하자 법인용MMF에 부분적으로 시가평가를 도입하는 후속 조치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국채·통안채·지방채·은행예금 등 안전자산 비율이 30% 이하인 법인용MMF의 기준가 산정에 시가평가를 적용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금융당국은 유사 시 시장 매각이 비교적 쉽고 크레딧 위험이 적은 안전자산을 일정 비율로 확보하면 법인용MMF의 유동성 관리가 용이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자산운용사 MMF 매니저는 "금융당국은 MMF 펀드런 때마다 편입 자산의 잔존만기(듀레이션) 한도를 단축하고 시가괴리율 범위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MMF의 유동성 확보 능력을 강화해왔다"며 "지난해 카타르 ABCP 사태는 금융당국이 더 이상 MMF 유동성 위기를 좌시할 수 없다는 태도로 전환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시장의 '학습효과', 위험감지되면 펀드런 '가속화'
지난해 카타르 ABCP가 법인용MMF 시장을 뒤흔들었지만 이전에도 편입 자산의 장래 부실을 두려워한 수익자들이 자금을 일시에 인출한 경우는 다수 있었다. 현재까지 누적돼온 시장의 학습효과가 MMF 펀드런에 일조하고 있다는 평가다.
1999년 대우 부실에 따라 투신사 금융상품에서 대량 인출의 기미를 보인 것이 그 시작이다. 당시 대우 회사채를 편입하고 있던 투신사 MMF와 채권형펀드에서 수익자들의 대규모 환매 발생이 우려되자 한국은행은 투신사 펀드에 담고 있던 환매조건부채권(RP)을 매입해 유동성 확보를 지원하고 필요시 공적자금도 투입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다행히 당시 MMF는 편입하고 있던 대우 회사채의 규모가 크지 않은 것으로 파악돼 큰 혼란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MMF에 대한 규제 강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계기로 작용했다.
2003년에는 두 사건이 잇따라 겹치며 MMF 시장이 크게 요동쳤다. 그해 3월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의 분식회계 파문이 일며 SK글로벌 회사채와 기업어음(CP)에 대한 부실 위험이 시장에 감지되자마자 연기금을 비롯해 은행 등 금융기관들은 앞다퉈 MMF에서 자금을 인출해나가기 시작했다.
SK글로벌 사태는 연체율 상승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카드채로 전이됐다. 특히 시장에 20조원 이상 풀려있던 LG카드채에 대한 부실 우려가 두드러지며 이 물량의 3분의 1 가량 보유하고 있던 투신사들의 MMF와 채권형펀드에서 펀드런이 발생했다. 당시 한 달여 기간 동안 MMF에서 20조원이 넘는 자금이 이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투신사들이 유동성 위기를 맞자 한국은행은 연기금과 금융기관에 환매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고 2조원 규모의 RP를 매입해 유동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여기에 은행권과 보험권이 '카드채투자전용 뮤추얼펀드'를 설립해 투신사 보유 카드채를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2015년에는 대우조선해양 CP에서 부실 가능성이 확산되며 일부 법인용MMF에서 자금이 일시에 유출됐다. 당시 설정액 기준 법인용MMF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던 하나UBS자산운용의 법인용MMF에서 대우조선해양 CP를 편입한 사실이 알려지며 2조원이 넘는 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갔다. 다만 하나UBS자산운용은 대우조선해양 CP를 만기상환받으며 시장의 우려와 달리 손실을 발생시키지는 않았다.
같은해 BNK캐피탈 회사채를 편입했던 일부 법인용MMF에서도 대규모 환매 요구가 발생했다. BNK캐피탈이 2014년 인수했던 약 540억원 규모 한일월드 렌탈채권에서 손실 가능성이 높아지며 BNK캐피탈 회사채에 불똥이 튄 탓이다. 당시 부산은행과 경남은행이 유사 시 BNK캐피탈에 자금을 대여해주겠다고 선언하는 등 사태 진화에 나섰지만 현대인베스트먼트자산운용 등 일부 운용사에서의 법인용MMF 자금 유출을 막지는 못했다. 2017년에는 한국항공우주(KAI)의 분식회계 의혹이 불거지며 KAI CP를 일부 편입했던 동양자산운용 등이 법인용MMF 환매 연기를 선언하기도 했다.
또 다른 자산운용사 MMF 매니저는 "지난 20년간 법인용MMF 시장은 철저한 학습효과를 거쳤다"며 "이 때문에 특정 자산이 결국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일단 위험 신호가 감지되면 펀드런이 발생하는 상황이 가속화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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