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민의 Money-Flix]음모론에 기댄 '블랙머니'가 남긴 아쉬움에 대하여외환은행 매각 논란을 투박한 범죄스릴러로 만든 영화 '블랙머니'
이철민 VIG파트너스 대표공개 2019-11-25 11:16:42
[편집자주]
많은 영화와 TV 드라마들이 금융과 투자를 소재로 다룬다. 하지만 그 배경과 함의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는 참인 명제다. 머니플릭스(Money-Flix)는 전략 컨설팅 업계를 거쳐 현재 사모투자업계에서 맹활약 중인 필자가 작품 뒤에 가려진 뒷이야기들을 찾아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려 한다.
이 기사는 2019년 11월 25일 10:3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지난 11월 14일 치러진 수능 국어시험에 BIS 결제 비율과 관련된 지문이 출제돼 주목을 끌었다. 그 지문은 법적 구속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00여 개 나라가 BIS 결제 비율을 따르고 있는 상황을 이른바 '말랑말랑한 법(softlaw)의 모습'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관련 문제 중 하나는 예시로 주어진 어느 은행의 BIS 비율을 계산해야 풀이가 가능한 것도 있었다.사실 BIS 결제 비율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상처를 남긴 몇 안 되는 금융용어 중 하나다. IMF, 모라토리엄, 서브프라임 모기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바로 그 용어가 대한민국 사회를 할퀴고 갈라놓기 직전에 태어난 학생들의 대입 시험문제에 등장한 것이다. 이제 그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는 상징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 법한 일일 것이다.
묘한 것은 그런 상징이 등장하기 바로 전날인 11월 13일, 그 상처를 다시 들춰내는 영화 '블랙머니'가 개봉했다는 점이다. 만약 수험생이 전날 '블랙머니'를 보고 다음날 수능을 봤다면,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전날 본 영화에 아주 결정적인 모티브로 몇 번이나 등장하는 'BIS 비율'이 바로 다음날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시험에 등장했으니 말이다.
영화 '블랙머니'는 2003년 부실화 징후를 보이던 외환은행을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인수하고 2012년 재매각할 때까지의 과정을 불법과 탈법은 물론 살인까지 난무하는 음모론적 시각에서 다룬 영화다. '남부군', '부러진 화살', '하얀전쟁' 등의 작품을 통해 이른바 '사회파' 감독으로 유명한 정지영 감독이 '남영동1985' 이후 7년만에 선보인 작품이기도 해서 주목을 끌었다.
영화는 2003년 매각 당시 외환은행의 BIS 비율이 조작됐다는 오랜 의혹에 철저히 기대고 있다. 비율의 계산에 있어 다양한 가정과 판단이 필요하므로, 사후적으로 평가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철저히 무시된 것이다. 물론 금융에 문외한인 대부분의 관객들의 몰입을 위해 필요한 장치였을 수도 있지만, 관련자들이 살해되기까지 한다는 설정은 영화적으로도 분명 과도하다.
이와 함께 영화에는 지난 16년간 외환은행의 매각과 재매각에 관련해 제기돼 왔던 다른 의혹들도 하나 둘씩 등장한다. 이른바 '검은 머리 외국인' 투자자, 권력자들과 모 법무법인의 결탁 그리고 당시 정치권과 검찰의 사건 무마 등이다. 그러나 정작 외화은행 매각건과 관련해 오랫동안 진행돼 왔던 방대한 수사, 지루한 법정공방 그리고 최종적인 판결 따위는 애써 무시한다.
대신 사사로운 일로 이 난장판에 끼어 들었다가 진실을 깨달은 한 검사가 이를 바로잡으려고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데 집중한다.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가 나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런 음모론적인 설정과 명확한 선악구도 그리고 직선적인 이야기 흐름에 기인한다.
물론 영화는 그 어떤 역사적 사건이라도 이를 재해석하고 재조립할 자유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머니'가 직접적으로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IMF 사태의 시작부터 리먼 브라더스 사태의 마무리까지 대한민국의 경제를 완전히 뒤바꾼 그 15년간의 이야기를, 좀 더 세련되면서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의 전개를 서민들의 시각에서 묵묵히 조망한 '라스트 홈'(99 Homes, 2014년)이나 금융계 종사자들 시각에서 극적으로 그려낸 '빅쇼트'(The Big Short, 2015년) 같은 영화들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살인, 검사, 권력, 음모를 억지로 등장시키지 않아도, 외환은행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훨씬 더 영화적으로 잘 전달할 방법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이버 영화의 '라스트 홈' 관련 페이지에서 발견한 다음과 같은 한줄 평은, '블랙머니'를 포함해서 경제를 다룬 우리나라 영화들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슬로(void****): 조폭과 폭력 액션 하나 없이도 잔인한 현실과 양심의 갈등을 뽑아내는 걸 봐라 충무로X들아"
'블랙머니' 예고편: https://www.youtube.com/watch?v=alSU8mnZC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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