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9년 12월 04일 07:3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A회사가 B회사에 8000억원 규모의 제품 제작을 의뢰했다. A회사가 발주한 제품은 워낙 규모가 크고 높은 기술력이 필요해서 B회사는 무려 5년이란 시간 동안 매달린 끝에 겨우 제품 제조를 완료했다. 이제 제품을 넘겨주고 남은 잔금을 치르기만 하면 되는 상황. 그런데 A회사는 돌연 주문한 제품이 필요 없다고 계약을 파기하자고 한다. 이럴 때 B회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다소 황당하게 들리는 얘기지만 실제로 최근 국내 조선업계에서 왕왕 발생하는 일이다. 예시로 든 A회사는 스위스의 한 선주인 트랜스오션(Transocean)이고, B회사는 국내 조선업체인 삼성중공업이다. 트랜스오션이 계약을 파기한 제품은 바로 드릴십이라는 선종이다. 최근 5년간 세계적으로 수요가 급감하며 삼성중공업이 이렇게 팔지도 못하고 억지로 떠안은 드릴십만 5척에 이른다.
드릴십은 석유 탐사를 위한 시추선의 일종이다. 깊은 바다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원유나 가스가 매장돼 있는 곳을 발굴하는 설비다.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가볍게 넘겼던 2010년대 초반에는 세계 주요 선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드릴십 제작을 의뢰했다. 수요가 급증하며 주문이 밀릴 정도였다.
그러나 국제유가가 2013년을 기점으로 하락한 현재 효자 제품이었던 드릴십은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삼성중공업이 팔지 못하고 재고로 보유한 5척의 드릴십 재고자산 규모만 1조8600억원에 달한다. 매각처를 찾지 못한다면 허공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 금액이다.
삼성중공업은 드릴십 5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연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재고로 보유한 드릴십을 대여해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어차피 지금 팔리지도 않는 드릴십을 놀리고 있을 바에야 대여를 통해 수익이라도 올려보자는 계산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제조업체가 렌탈업에 도전(?)한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유가 하락과 함께 드릴십 용선료도 떨어지면서 대여를 통해 큰 이익을 실현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대여 자체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업 불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삼성중공업에게는 조금의 이익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수주잔량은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어 지금의 위기만 넘긴다면 재도약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과연 삼성중공업은 드릴십 대여를 통해 위기를 타개하는 묘수를 발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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