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9년 12월 20일 10: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유가가 하락하면서 국내 조선사들이 건조한 원유 시추선(드릴십)을 해외 발주사에서 계약을 해지하고 찾아가지 않는다는 소식이다. 용선료가 폭락했기 때문이다. 드릴십은 한 척에 5~8천억 원이다. 선수금이야 몰취하지만 건조 비용은 고스란히 들어갔다.주문이 있어야 생산하는 선박은 가격이 워낙 비싸고 건조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경제상황 변화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선주들은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마련인데 그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선수금을 포기하고 선주 감독관을 철수시키는 경우는 양반이고 온갖 트집을 잡아 조선사에 귀책이 있는 것으로 하려는 행태도 많다.
1973~1974년 1차 오일쇼크 때 현대중공업은 선주들이 배를 인수해 가지 않아서 골머리를 앓았다. 소송전도 벌어졌다. 그러다가 아산은 발주처가 찾아가지 않는 26만 톤급 VLCC(초대형 원유운반선) 3척을 가지고 해운회사를 설립해 버렸다. 1976년 3월 25일 아세아상선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석유는 국적선사가 운송을 담당하면 되겠다는 것이 아산의 생각이었다.
그러자 외국 선사들은 그러면 자기들이 입게 되는 ‘손해’ 1400만 달러를 보전해 달라는 괴이한 요구를 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아산이 누구인가. 일축하고 기 싸움을 벌여 결국 국제석유메이저들이 뒷배로 있는 그네들을 제압했다. 한 푼도 주지 않았다(이 땅에 태어나서, 191~196).
그렇게 VLCC로 출범한 아세아상선은 컨테이너, 벌크, 광탄, 중량화물, 특수제품 등 신사업에도 진출, 원유, 석탄, 철광석, 특수화물 등 전략물자를 주로 운송했다. 1977년에 원양예인선단을 갖추고 사우디 주베일항만을 포함한 현대의 중동 건설현장에 자재를 수송하는 일을 전담했다. 그리고 설립된 지 3년 만인 1979년에 1억 달러 운임을 달성하면서 대형 선사로 자리잡는다.
당시 3척의 VLCC를 찾아가지 않던 선주들 중 한 사람이 현대중공업 탄생의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조지 리바노스(85)다. 그리스 선사 선엔터프라이즈 회장이다.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아산에게 유조선 2척을 발주해 준 바로 그 사람이다. 7308호, 7310호 두 척은 홍콩의 CY퉁이 계약금을 포기하고 철수했는데 7302호를 주문했던 리바노스는 온갖 구실로 배를 인수하지 않아 소송까지 갔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리바노스 회장은 본의 아니게 현대상선의 탄생에도 기여한 셈이 된다.
아세아상선은 1983년 8월에 현재의 상호인 현대상선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일련의 M&A가 있었다. 1985년 8월에 동해상선을 흡수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신한해운을 흡수했다. 당시 해운업계는 부채가 무려 4조 원대일 정도로 경영난에 있었는데 5공 정부가 1984년 5월에 팬오션의 전신인 범양상선과 한진해운의 전신인 대한선주를 포함 63개 해운사를 17개로 통폐합하고 채무상환을 유예하는 것을 골자로 해운산업합리화 계획을 내놓았었다.
1988년에는 고려해운을 합병한 후에 화물집하영업을 별도 회사로 분사했는데 이 회사는 현대물류, 현대택배, 현대로지엠, 현대로지스틱스 등으로 이름을 수차 바꾸었다. 지금은 롯데글로벌로지스다. 현대상선은 1995년 10월 5일에 상장회사가 되었고 1999년 8월에는 한소해운을 흡수합병했다.
현대상선이 1985년에 인수한 신한해운은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부친인 현영원(1927~2006) 대표가 설립했던 회사다. 아세아상선이 탄생했던 바로 그 해 1976년에 아산과 사돈이 되었던 현영원 대표는 아산이 아세아상선을 설립할 때 조언자였다고 한다. 신한해운이 현대상선에 합병된 후 현대상선의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합병 당시에는 고 정몽헌(1948~2003) 현대그룹 회장이 대표이사 사장이었는데 정몽헌 회장은 1998년까지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1998년은 현대상선이 금강산 관광선 운행을 시작했던 해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2001년에 현대아산에 인계되었다.
2000년에 현대가 현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세 그룹으로 재편될 때 현대상선은 현대에 포함되었다. 2003년 정몽헌 회장 타계 후 현정은 회장이 경영을 이어받았다. 현대그룹 매출의 거의 70%를 차지했을 정도로 비중이 큰 회사였으나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장과 해운업황 부진을 이기지 못했다. 현대상선과 함께 양대 국적해운사였던 한진해운도 2017년에 파산했다.
2010년에 현대상선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자 주채권은행인 당시 외환은행이 현대그룹에 재무구조개선약정 체결을 요구했다. 논란 끝에 현대는 위기를 잠깐 벗어났지만 바로 현대건설 인수전에 무리하게 뛰어들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실패했다. 2013년에 내놓은 자구안은 역부족이었다. 부채가 약 6조3천억 원에 달했다.
설상가상으로 현대상선 경영권 방어용으로 투자했던 파생금융상품 손실이 늘어나 현대엘리베이터의 30%대 지분을 가진 2대 주주 스위스 쉰들러로부터 배임과 손해배상 소송까지 당했다. 경제개혁연대도 가세했다. 현대그룹은 2003~2004년에 아산의 막내 동생 정상영 현 명예회장의 KCC와 경영권 분쟁을 치르면서 경영권 방어 문제에 민감해져 있었다. 쉰들러는 현대엘리베이터의 현대상선 지원에도 계열사 부당지원이라며 수차례 제동을 걸었다. 스위스 정부까지 동원했다. 쉰들러는 KCC와의 분쟁 때는 우군이었지만 현대의 현대건설 인수 시도를 계기로 사이가 멀어졌다.
결국 현대상선은 2016년 8월에 감자와 채권단 출자전환을 통해 산업은행으로 넘어가면서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되었다. 약 6조 원 규모의 정부보증 대출과 영구채 지원도 더해졌다. 가까스로 법정관리를 피한 것이다. 현재 산업은행의 현대상선 지분은 17.42%다. 이 과정에서 현대는 1977년에 인수했던(국일증권) 현대증권의 지분 29.62%도 그룹 재무구조 개선책의 일환으로 KB금융지주에 1조2500억 원에 매각했고 현대상선과 현대증권을 잃은 현대그룹은 자산가치 5조 원 아래인 중견기업이 되었다.
세간에서는 현대상선의 계열분리를 두고 ‘현대그룹의 몰락’이라는 말도 쓰지만 그 말은 문법에는 맞아도 그다지 탐탁한 말은 아니다. 아산이 만든 ‘현대’는 현대건설을 포함한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중공업을 포함한 현대중공업그룹, 그리고 범현대 기업들을 통해 한국경제에서의 위치와 그 역사적 정체성을 잘 보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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