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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 아산 정주영 레거시]미스터 정, 여의도에 가다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20-01-31 10:20:36

이 기사는 2020년 01월 31일 10:2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2011년에 기밀 해제되고 2017년 1월 23일 홈페이지에 공개된 보고서에서 1980년대 초 한국 경제 동향을 분석하면서 아산을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비판적인 인사로 분류했다.

CIA는 '한국: 경제적 의사결정의 과도기'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정 회장은 한국 언론이 '자수성가의 전형'으로 칭하는 백만장자"이고 "재계와 한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며 미국에 호의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정 회장은 일반적으로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비판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대통령 취임 후 정부가 후원하는 여러 경제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아산은 5공과 6공 정부에 대해 매우 실망했던 것 같다. “5·6공을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지도자 복이 참으로 없는 나라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이 땅에 태어나서, 422~423). 정권의 정치자금 요구와 아무런 기준 없는 세무조사, 정부의 경제에의 과도한 개입과 무능한 경제 운용이 아산을 실망하게 했다.

아산이 익숙했던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필요한 경제 현안에 따라 정권과 기업이 주고받는 형식의 거래를 했다. 그런데 5, 6공은 상당히 일방적이었던 모양이다. 정권의 비자금 조성에 협조하지 않으면 재계 7위였던 양정모 회장의 국제그룹처럼 해체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결국 이 추세는 점점 ‘진화’되어서 후대에는 노골적인 후원 요구로 변모하게 된다.

아산은 정치에 대한 실망 때문에 ‘새롭게 도전할 새 일감으로’ 정치 참여를 결심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5년 동안 해결이 필요한 모든 국가적 현안을 모두 깨끗이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2년 1월 1일에 77세의 아산은 매년 있는 설 가족 모임에서 폭탄선언을 한다. 정계 진출의 뜻을 밝힌 것이다.

1992년 초에 아산은 통일국민당을 창당해서 그해 3월 총선에서 31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통일국민당의 득표율은 17.4%로 지역 기반도 없는 신생 정당이 거둔 가장 큰 성공이었다. 이변이었고 정치권에는 큰 충격이었으며 아산이 하는 일다운 결과였다. 특히 강남 3구에서 득표가 많았다는 점에 비추어 새로운 보수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아산이 매우 고무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총선 성공 후 통일국민당은 기세를 올렸고 인재들도 속속 영입되었다. 자신의 아이콘인 호랑이를 상징으로 내세우고 아산은 반값 아파트, 국가보안법 폐지, 초등학교와 중학교 전면 무상급식, 심지어 ‘재벌 해체’와 같은 지금 보아도 파격적인 공약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기성 정치의 벽은 아산에게도 너무 높았다. 그리고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의 역풍을 맞았다.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렸다. 대선 결과는 득표율 16.3%에 그쳐 김영삼, 김대중 후보와 격차가 큰 3위로 나왔다.

선거 후폭풍으로 현대는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당했다. 당시 총자산 규모 23조 원으로 21조 원의 삼성에 앞선 1위 그룹 현대는 정권이 돈줄을 다 막아버려서 거의 2년간 씨티은행 외에서는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웠다. 산업은행이 시설자금을 동결했고 해외증권 발행도 봉쇄되었다. 유상증자도 못하게 막았다. 삼성에 1위 자리를 내주었다. 과하다는 여론도 일부 있었지만 당시 하나회 척결에서 시작된 지지율 최고 94% 기적의 주인공 문민정부의 기세가 워낙 등등했다.

아산의 정계 진출에 대해 세간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돈을 넘어 권력까지 욕심낸다는 것이었다. 동기가 이해는 되지만 어쨌든 과욕이었다는 시각이 많다(최정표, 한국재벌사연구, 142~145). 재벌이 정치권력을 가지려고 한다는 비판은 경쟁 정치인들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홍보 카피였고 일반의 인식도 그에 부응했다. 지금은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고 블룸버그가 트럼프에 도전장을 내는 시대지만 당시만 해도 부호의 정계 진출은 쉬운 컨셉이 아니었다. 아산재단 정몽준 이사장이 지적한 대로 아산은 기존의 관념, 그리고 사회 분위기와 싸웠던 것이다(한겨레, 1996.6.13.).

물론 아산은 부인한다. “나라를 구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동기는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도 단 한 가지 이유로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잘 못 생각할 수도 있고 합리화도 있고 외부의 시각에 저항하기도 하면서 생각을 추슬러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다.

그런데 아산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정계 진출과 대통령 출마는 나라를 구하고 싶었다는 아산의 회고가 진심이었다고 믿게 한다. 아산의 기업인으로서의 활동과 그 외의 사회적 활동은 요즘과는 달리 뭔가 국가적인 이익과 혼재되어 있었고 그런 생애를 산 아산은 그 두 가지가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아산이 회고록을 쓴 시점은 김영삼 정부가 실패하고 국가 부도를 맞은 상황이었었기 때문에 아산의 회한이 진하게 묻어나온다.

“혹자는 나의 대통령 출마에서의 낙선을 두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주장하던 내 인생의 결정적 실패라 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쓰디쓴 고배를 들었고 보복 차원의 시련과 수모도 받았지만 나는 실패한 것이 없다. 오늘의 현실을 보자. 5년 전 내가 낙선한 것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YS를 선택했던 국민들의 실패이며, 나라를 이 지경으로 끌고 온 YS의 실패이다. 나는 그저 선거에 나가 뽑히지 못했을 뿐이다. 후회는 없다.”(428) 이 구절, 그리고 “후회는 없다”가 아산 회고록의 사실상 마지막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산의 정계 진출이 아산의 전 생애에 걸친 업적에 아쉬운 그림자를 지웠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아산의 정계 진출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결과론이고 가정이지만 아산이 대통령이 되었었다면 한국이 국가 부도를 맞는 상황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산이 대통령에 나선 것이 잘못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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