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0년 02월 21일 07:5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최근 국내 바이오 벤처 투자업계를 대표하는 1세대 벤처캐피탈리스트를 만나 고 허영섭 녹십자 회장의 과거 투자 스토리를 들었다. 녹십자야말로 국내 제약기업 중에서 사실상 가장 먼저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투자를 단행했다는 내용이다.때는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와 서정선 서울대 의대 교수, 성영철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각각 바이로메드(현 헬릭스미스), 마크로젠, 제넥신을 창업했다. 국내 1세대 바이오 벤처의 시작이었다.
고 허 회장은 대학교수들이 신약 및 새로운 기술 개발을 위해 창업에 뛰어든 것을 보고 수십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투자했다고 한다. 당시 임원들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들 바이오 벤처에 투자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개념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퍼져 있었던 것도 아닌 데다 매년 적자가 날 것이 불 보듯 뻔한 회사에 투자하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허 회장은 "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교수님들이 회사를 차려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한다고 하는데 당연히 도와주는 것이 맞다"며 강행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3곳은 현재 국내를 대표하는 바이오 벤처로 우뚝 성장했다. 기술 개발 결과 상업화에 성공한 곳도 있으며 글로벌 신약 개발을 목전에 두고 있는 곳도 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국내 대형 제약사였던 녹십자의 투자가 이들이 성장하는데 자양분이 됐음이 분명하다.
2009년 허 회장이 숙환으로 타계한 이후 10년이 흘렀다. 현재 녹십자그룹은 동생인 허일섭 회장이 이끌고 있지만 이 기간에 고 허 회장의 차남과 삼남 모두 그룹 경영에 발을 들였다. 차남인 허은철 사장은 그룹의 모태인 녹십자 대표를, 삼남인 허용준 부사장은 그룹 지주회사인 녹십자홀딩스 대표를 맡고 있다.
3세 경영의 기틀을 쌓아가고 있는 녹십자그룹에 최근 큰 변화의 조짐이 불고 있다. 녹십자는 알짜 사업 중 하나인 '혈액백(헌혈자로부터 채취한 혈액을 저장하는 용기)' 사업부문을 매각하려고 한다. 그룹 내 혈액백 사업은 녹십자의 자회사인 녹십자엠에스가 담당하고 있다.
또 허용준 부사장이 헬스케어 등 신사업 투자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녹십자홀딩스는 최근 자회사인 녹십자헬스케어를 통해 국내 1위 전자의무기록(EMR) 솔루션 기업 유비케어를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녹십자홀딩스와 그 재무적투자자(FI)인 시냅틱인베스트먼트가 녹십자헬스케어가 유비케어를 인수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한다.
부친인 고 허 회장의 20년 전 바이오 벤처 투자는 국내 바이오 산업 도약의 밑거름이 됐다. 허은철 사장과 허용준 부사장의 사업 재편이 녹십자그룹의 새 미래 청사진뿐만 아니라 국내 헬스케어 산업의 '퀀텀 점프(Quantum jump·비약적 성장)'를 위한 디딤돌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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