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0년 11월 04일 07:4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벤처투자업계에 '데스벨리'는 초기기업이 창업 3년 이후 사업화 단계에서 자금 위기에 직면하는 구간을 말한다. 설립 초기 마련한 종잣돈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온다. 대략 10년 성장 생태계 곡선에서 몇차례 위험 구간이 존재하는데 이 때 동아줄 역할을 하는 게 벤처캐피탈이다.모험 투자를 주저하지 않는 벤처캐피탈 재원으로 일부는 싹을 틔우고 화려한 거목으로 성장한다. 죽음의 계곡을 넘지 못한 일부는 생태계 자양분으로 수명을 다하고 사라진다. 국내 스타트업 10곳 중 7곳이 5년내 문을 닫을 만큼 생존확률이 희박하다.
이처럼 창업 생태계 최일선에서 젖줄 역할을 하는 벤처캐피탈에게도 데스밸리가 존재한다. 벤처캐피탈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한국벤처투자와 한국성장금융은 각각 출자사업에 별도 루키리그를 두고 있다. 신생 벤처캐피탈의 열악한 자산 규모와 트랙레코드를 고려한 조치다.
설립 3년내 또는 운용자산(AUM) 400억원 미만인 창업투자회사는 모태펀드 루키리그 지원자격을 얻는다. 성장지원펀드의 경우 설립 5년내 창업투자회사와 신기술금융회사에 루키리그 문을 열어놨다.
허니문 기간은 딱 여기까지다. 루키리그에 선정돼 관리보수가 약정된 3년의 시간이 흐르면 살길이 막막해진다. 재빨리 투자처를 찾아 펀드 재원을 소진해 '처녀 실적'을 쌓고 농금원펀드, 엔젤세컨더리 등 틈새를 찾아 살길을 도모해야 한다.
일부는 프로젝트펀드를 만들어 프리IPO 투자 등으로 근근히 연명하고 있다. 운이 좋아 2호 펀드를 결성해도 고난의 연속이다. 중대형 벤처캐피탈과 경쟁해 모태펀드와 성장지원펀드 일반리그에서 출자사업을 따내기가 바늘구멍 뚫기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그룹계열이 아닌 독립계 벤처캐피탈이 처한 현실은 더욱 암울하다. 창업 생태계에 자금을 공급하는 대부분 연기금과 공제회가 성장지원펀드와 모태펀드 등 외부 유동성공급자(LP)로부터 받은 일정 비율의 출자확약을 조건으로 내건다. 결국 곳간의 쌀을 내어 줄 수 있으나 먼저 옆집의 보증서를 끊어 오라는 의미다.
한 벤처캐피탈은 펀드 조성금액의 50%에 해당하는 수백억원을 모아 GP 커밋(운용사 출자금)으로 제안했지만 연기금과 공제회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했다. 역시 모태펀드의 출자확약이 없다는 이유였다. 좋은 딜을 발굴하는 운용사의 능력과 펀드에 담길 포트폴리오의 잠재 가치 평가는 그 뒷전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소형 벤처캐피탈은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다. 중장기간 모태펀드와 성장지원펀드 트랙레코드를 쌓은 그들만의 '승자독식리그'가 굳어져 있다. 역설적이지만 중소벤처기업 육성을 목적으로 한 창업 생태계의 유동성 공급 밑단에 '갑과 을', '대형사와 소형사'로 구분돼는 양극화가 존재하는 셈이다. 돈 가뭄에 지친 소형 벤처캐피탈 가운데 일부는 개점휴업 상태에 빠지거나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오고 있다.
올 들어서 모태펀드와 성장지원펀드를 통해 벤처투자업계에 유입된 자금이 2조원을 웃돈다. 그 많은 돈은 누구를 거쳐 어디로 흘러갔을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다면 우리의 벤처투자 생태계 식탁은 좀 더 풍성해질 것이다. LP와 GP간에 갑과 을의 구도가 영원히 유지될 것이라는 법도 없다. 투자 스펙트럼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관성화된 행태에서 벗어날 때 모험자본도 생명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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