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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술투자의 '스푸트니크 모멘트'

민경문 기자공개 2011-03-23 09:00:57

이 기사는 2011년 03월 23일 09: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한국기술투자(이하 한기투)만큼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 붙는 창투사가 또 있을까. 국내 최초 전문 창업 투자 회사(1986년), 벤처캐피탈(VC) 업계 최초 코스닥 상장(1989), 중동 국부펀드 최초 운용(2008년) 등등.

지난 25년간 한기투가 일궈낸 기업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NHN, 메가스터디, 한글과컴퓨터 등이 한기투의 자금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투자 기업만 무려 520여곳. 이 중 120여개 기업이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한기투’라는 이름 만으로도 그 존재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지난해 한기투 경영권을 인수한 일본계 펀드 SBI홀딩스로서는 사명 문제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기투’라는 간판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내부 의견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결국 경영진이 택한건 SBI기술투자라는 새로운 사명이었다.

과거의 영광만으로는 치열한 벤처업계에서 더 이상 살아날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는 한 때 ‘벤처업계의 신화’로까지 불렸던 서갑수 전 한기투 회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했다.

경영권이 바뀌지 전까지 한기투는 사실상 서갑수 회장을 의미했다. 아들(서일우 전 KTIC홀딩스 대표)까지 개입시켜 계열사 주가를 조작, 부당이득을 챙기고 회사 돈까지 빼돌린 그의 행각은 회사에 작지 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SBI 측에선 무엇보다 그 동안 쌓아왔던 회사의 평판이 떨어지는 점을 우려했을 것이다. 금융회사 입장에서 대주주 혹은 경영진의 모럴 해저드는 치명적일 수 있다. 특히 정부 및 투자기관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펀딩을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창투사로서는 더욱 그렇다.

이는 지난해 한기투의 조합 결성 실적에서 그대로 증명됐다. 한기투는 2010년 한 개의 벤처 조합도 결성하지 못했다. 정책금융공사, 모태펀드 등 주요 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용사 선정에 단독 신청했는데 탈락한 적도 있었다. 영업적자는 벌써 3년째 계속되고 있다.

한기투로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올해 국정 연설에서 위기 극복을 강조하며 외쳤던 ‘스푸트니크 모멘트(Sputnik moment)’가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SBI홀딩스가 ‘한기투’라는 간판을 버린 것 뿐만 아니라 투자 심사역을 상당수 물갈이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본사 사무실도 새롭게 옮긴 상태다.

물론 ‘한국’ 대신 SBI를 사명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스스로 일본계 펀드라는 점을 자인한 점은 부담일 수도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국내 LP들이 일본계 펀드에 대놓고 비협조적으로 나설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한국 벤처캐피탈의 대명사인 한국기술투자를 어떻게 일본 자본에 넘길 수 있느냐”는 서 회장 측 주장이 일부 공감대를 형성한 이유이기도 했다.

한기투 관계자는 현 상황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고 했다. 일본계 펀드로서 국내 벤처시장 발전에 적극 기여하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것. 그 동안 일본계 자금이 보여온 보수적인 이미지 역시 바꿔나갈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최근 한기투는 관계사인 SBI PE를 통해 정책금융공사가 출자하는 한일상생펀드의 운용사 선정에 지원했다고 한다. 한기투, 아니 SBI기술투자로서는 일단 첫 번째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그 결과에 따라 향후 SBI기술투자의 서바이벌 가능성을 점쳐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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