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2년 04월 17일 11:2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금융감독원이 1998년 발표한 보도자료인 '회사채 발행절차 개선방안'을 우연히 발견해 훑어보다 혼자 웃고 말았다. 표현과 초점에 조금 다른 구석이 없지 않지만, 올해 도입한 기업실사와 수요예측 등 선진화 방안과 다를 바 없는 게 아닌가.당시는 보증사채에서 무보증사채로 시장의 흐름이 넘어오고 있는 때였다. 회사채 발행 절차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주관사가 총액인수를 하게 되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투자자보호 절차는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발행신고서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고 투자설명회는 개최되지 않았다. 일일이 거론하고 보니 지금과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당시에는 채권 수요자의 힘이 더 셌는지, 투자자모집이 덜 되면 주관사가 남은 물량은 발행사에게 되돌리는 행위(리턴)가 큰 문제였던 모양이다.
문제가 같으니 해법이 같은 게 이상할 게 없다. 당시 감독원은 회사채 발행 전 사전 매출을 금지하고 주관사의 총액인수가 실질적으로 이행될 것을 요구했다. 절차에 없었던 수요예측을 도입했다. 사업설명서의 수준을 높이고 1회 이상 투자설명회를 개최토록 했다. 이 역시 폭과 깊이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 지난해 마련해 올해 도입한 선진화 방안과 취지와 내용이 거의 같다.
따지고 보면 회사채 시장 발전을 위한 정책적인 시도는 그 이후에도 수 없이 많았다. 거의 매년 정비해야 할 제도 중 하나로 정부 안건에 올라갔고 전문가 의견 수렴을 거치기 위해 태스크포스(TF)가 꾸려졌고 매번 거의 같은 내용의 대책이 나왔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 문제들이 그렇게 오래 유지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채권시장 내부의 적도 적지 않았다. 자신이 일을 맡은 동안 성과를 낼 수 있는 지엽적인 이슈에만 몰두하고 정작 중요한 과제들은 나몰라라 하는 당국자들, 총대를 메기 싫어 당국에게 기대기만 하던 금융투자협회(과거 증권업협회와 자산운용협회 포함) 등 관련 기관과 단체들, 현실성 없는 대책을 만들어 놓고 용역료만 받아 챙겼던 연구소와 교수들(문제가 오랫동안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이들의 수입에는 더 나았겠지), 허접한 시장을 욕하면서도 오히려 그 익숙함을 즐겼던 증권사·투자자·기업들도 부분적으로 채권시장 내부의 적이다.
내부의 적은 여전히 암약(?)하고 있다. 실질적인 발행수요와 투자수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모와 사모의 기계적인 구분에 집착해 적격투자자(QIB) 채권시장을 '실패할 모델'로 만든 누구, 정보투명성과 신용평가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할 독자신용등급이 마치 기업을 압박하는 제도인 것인 양 호도하는 누구, 기업실사와 수요예측이 의무화되자 되레 이를 우회해 이익을 챙기거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누구들이 있다.
내부의 적들은 과거 15년간 줄곧 성공해 왔다. 그 성공은 그들을 포함한 시장 참가자 모두의 뼈아픈 실패였다.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돌아서면 적으로 돌변하는 내부의 적을 견제하지 못한다면 시장의 진화를 위한 어떤 노력도 구호에 그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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