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에 등장한 첫 한국 부실채권 '진로' [한국의 NPL시장]②진로 등 화의채권, 국제시장에 매각…자산관리 노하우 배운 계기
강예지 기자공개 2015-11-16 14:13:36
[편집자주]
외환위기 직후 형성된 국내 부실채권 시장이 어느덧 20여 년을 바라보고 있다. 다듬어진 투자과정과 질서를 바탕으로 발전한 이 시장에 대해 국내외 시장참여자의 관심이 늘고 있다. 부실채권 시장이 대체투자의 한 분야로 자리잡기까지 시장참여자의 성공과 실패,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슈를 다뤄보고자 한다.
이 기사는 2015년 11월 02일 17:5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국제시장에 처음 등장한 한국의 초대형 부실채권은 '진로'였다. 1990년대까지 국내 소주시장을 주름잡던 진로였지만 그룹의 무리한 사세확장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해 IMF가 터진 1997년 다른 계열사 5곳과 함께 법원에 화의를 신청했다. 진로그룹은 공중분해됐고,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인수한 진로 채권은 1998년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 10%의 가격으로 팔렸다.이 때가 한국의 부실채권이 국제금융시장에 등장한 순간이자, 국내 부실채권시장의 시작이다. 당시 진로의 무담보채권에 외국인 투자자가 관심을 보였다는 건 국내 시장참여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상적인 시장 상황이라면 모를까 국가가 부도위기를 맞고 있었고 시장이 완전히 붕괴한 상태에서 외국으로부터 구매자들이 날아온 것이다. 망한 기업에 투자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당시 국내 투자자들이 부실채권투자에 눈을 뜨게 된 계기다.
◇암울했던 90년대…법정관리 포함 96% 무담보채권의 매각
1990년대 후반 국내의 경제적 상황과 분위기는 2000년대 금융위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암울했다. 금융기관 부실자산의 정리전담기구였던 캠코는 1997년말부터 2년여 간 56조 원에 달하는 금융기관 부실채권을 매입했다. 은행과 보증보험, 생보사, 종금사 등 전 금융권에 걸친 대대적인 구조조정 과정이었다.
국제금융시장을 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부실채권 매각은 1998년 9월이었다. 부실채권 매각의 초기 단계였던 당시 캠코는 시장의 투자수요를 확대하기 위해 국제적 공개 입찰매각 방식을 택했다. 부실채권 정리와 유동성 확보가 최대 과제로 떠올랐던 1998년에서 1999년, 혼란스러운 국내 금융환경에서 캠코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매각대상에는 ㈜진로와 ㈜진로종합유통, ㈜진로종합식품, ㈜건영, ㈜우성건설 등 13개 기업의 부실채권 2075억 원 상당이 포함됐다. 입찰에는 골드만삭스와 리먼브라더스, 뱅커스트러스트, 모간스탠리, 메릴린치 5개 외국 투자자가 참여했다.
주목할 점은 매각대상 자산의 성격이다. ㈜진로와 ㈜건영 등 법정관리와 화의인가 결정을 받은 채권들로 이 중 96%가 무담보채권이고 담보부채권은 4%에 불과했다.
당시 한국의 외국환평형기금채권 가산금리가 10% 이상에서 형성되는 등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이 높았고 이를 반영한 응찰가격은 캠코의 예상보다 낮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여러 투자기관들이 참가의사를 밝혔고 자산을 실사했다. 자국에서 투자경험이 있는 외국 투자자들이 주로 활동하기는 했지만 당시 국내외 금융·경제상황, 초기 시장 환경에 대한 인식을 고려할 때 경쟁입찰이 가능했던 점이 흥미롭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당시는 IMF 외환위기 직후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암울했던 시기"라며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업, 담보조차 없는 채권을 돈을 주고 산다는 점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입찰결과 5곳 투자자 중 골드만삭스가 낙찰됐다. 당시 낙찰가격은 물론 80~90%대를 호가하는 지금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골드만삭스는 총 채권액의 12.3%에 해당하는 254억 원을 캠코에 지급했다. 이에 더해 투자금액에서 내부수익률 15%를 가산한 금액을 초과하는 수익금액에 대해 50% 이상을 캠코에 지급하는 잔존이익배분방식이었다.
◇"기업보는 시각 달랐다"
캠코는 '골드만삭스는 대상채권을 관리하고 잔존가격을 최대화하여 매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계약조건을 붙였다. 자산을 단순 매각한 것이 아니라 자산 관리로 가치를 높여 처분하도록 양도채권의 관리·매각 조건을 내건 것이다.
당시 캠코 등 국내 기관과 외국계투자자는 조인트벤처(JV) 형태로 자산관리회사(AMC)를 두고 있었다. 인수한 채권은 자산관리회사를 통해 관리됐는데, 일련의 업무과정을 통해 자산관리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부실채권 투자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방법론이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 투자자나 자문사, 매각주체인 금융회사 사이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자산관리기법과 기업분석 등의 노하우다.
예로 당시 외국계 투자자들은 기업 영업에 대한 평가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다. 기업이 정상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지, 당시의 부실이 일시적인지 영구적인지 여부 등 재무제표로는 충분히 얻을 수 없는 근거를 모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예로 진로의 경우, 영업 현금흐름이 굉장히 일정해 예측이 가능했고, 일부 투자자는 이같은 분석 포인트를 근거로 당시의 재무적 문제가 일시적이라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당시 딜을 돌아볼 때 외국계 투자자가 부실채권을 보는 시각이나 통찰력이 우리 투자자와는 달랐던 것 같다"며 "지금은 상식적인 평가방법론이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있다. 여러 딜을 통해 외국계 투자자로부터 배우게 된 시각이나 노하우가 있다"고 말했다.
◇진로는 헐값에 팔렸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딜이 회자되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실채권 매각이라는 점과 동시에 성공적인 부실채권 투자의 대표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평가의 이면에는 당시 자산을 인수한 외국계 투자자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자리잡고 있다. '좋은 기업의 채권을 싼 값에 사서 비싼 가격에 팔고 나갔다'는 인식이다.
입찰매각 후 풀(pool) 안에 담긴 자산 중에서도 진로는 가장 '핫(hot)'한 자산으로 떠올랐다. 당시 시장에서는 진로 채권을 두고 '자고 일어나면 가격이 오르더라'고 말할 정도였다. 일부 투자자는 시장에서 진로 채권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는 후일담도 들려온다.
진로는 7년여 뒤인 2005년 하이트맥주 컨소시엄에 인수됐다. 인수가는 당시 IB업계(투자은행)의 예상치를 뛰어넘는 3조 4288억 원이었다. 투자업계에서는 채권의 출자전환 등을 근거로 골드만삭스가 OLB(Original Legal Balance) 기준 약 125% 안팎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시장 참여자들의 생각은 이같은 인식과는 전혀 다르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후에 "일각에서 가격이 낮았다는 인식이 생겼지만, 당시에는 적정한 가격에 매각됐다는 점에 시장 참여자들이 공감했다"고 말했다.
외국계 투자자들도 진로가 소위 '대박'을 터뜨릴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투자업계 다른 관계자는 "당시 급박하게 돌아갔던 시장 상황과 기업의 불확실성 등 리스크를 안고 투자한 것"이라며 "(우리 시장은) 투자경험과 노하우, 여력이 없었던 복합적인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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