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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기업'을 '좀비기업'으로…산은 기업살리기 역량 약화 [산은 기업구조조정 흔들]①자구안 101% 달성한 현대그룹에 '채찍'만 휘둘러..실패 사례 거듭 증가

문병선 기자/ 안경주 기자공개 2015-11-12 12:24:27

이 기사는 2015년 11월 11일 15:5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연초 산업은행의 기업구조조정이 연이어 실패하자 불거진 지적이 "부실징후 대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수십년간 구조조정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온 산업은행의 구조조정 약발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STX그룹 구조조정과 동부그룹 구조조정에서 연이어 실패했던 터라 터무니없는 지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실패사례보다 성공사례를 훨씬 더 많이 가진 산업은행의 과거 경험이 있어, 일시적이겠거니 하는 옹호론이 없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 때부터 1년 가량이 지난 요즘 산업은행의 대기업 구조조정 행보를 보면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대우조선해양을 필두로 한 조선업종 구조조정 뿐 아니라 약 3년의 시간동안 구조조정을 진행해 온 해운업 구조조정에서도 잇따라 실패할 듯한 오락가락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과연 산업은행의 대기업 구조조정 정책은 제대로 실무에서 구사되고 있는지, 정책 수립 단계와 의사결정 과정에서 숨겨진 문제점은 없는지, 심층 점검해 보아야한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현대그룹은 현대상선·현대엘리베이터·현대증권 등을 보유한 금산 복합 대그룹 계열이다. 해운 운임료가 폭락했던 3년여 전부터 산업은행 주도의 대기업 구조조정 작업을 시작했으나 최근 현대증권 매각 실패 이후 풍랑에 휩싸이고 있다.

현대그룹은 2013년부터 3조3000억원 규모의 자구계획안을 입안한 뒤 산업은행의 '오케이(OK)' 사인을 받고 나서 실행에 나섰다. 지난 10월말 기준 자산을 팔거나 비용을 절감하거나 자본을 확충해 3조3318억원 규모의 자구안 이행 실적을 달성했다. 101% 달성률이다. 정상적이라면 여기서 산업은행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고 진행돼 온 현대그룹 구조조정은 끝나는 게 맞다.

하지만 상황은 극적 반전 국면이다. 현대그룹이 3조원대 자산을 팔아 지키려한 현대그룹의 몸통 '현대상선'을 매각해야 한다거나 채권단 관리(워크아웃)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정부 일각에서 최근 흘러나왔다. 2000년대 초부터 시숙들과의 끝없는 경영권 분쟁에서도 지켜냈고 팔 수 있는 자산 모두를 내놓아 지키려 한 현대상선을 이제 팔아야 한다고 하니 현대그룹 입장에서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산업은행이 직간접적으로 이런 여론전에 연관돼 있는지는 확실치 않고 확인될 수도 없지만 현대그룹이나 재계에서는 '구조조정 집도의'인 산업은행이 그 구실을 제공했다고 믿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3조원 어치 자산을 팔라고 해 시키는대로 다 했고 이제 더 이상 팔 것도 남아있지 않자 몸통마저 내놓으라는 꼴인데 이게 어떻게 구조조정이냐"며 "이만큼 채권단 요구를 들었다면 채권단 차원에서 해운업 전체 지원 방안을 논의해 주거나 뾰족한 방안을 강구해주는게 맞는데, 이제와서 그룹을 해체하라는 듯한 뉘앙스의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현대증권 매각이 실패로 결론난 뒤 현대그룹은 산업은행에 다시 매각 절차를 진행해 달라고 하는데, 산업은행은 이제와서 자신들의 자회사인 대우증권 매각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해서인지 당분간 매각(현대증권)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아 버려 현대그룹의 자구 실행 여지를 없애버렸다"며 "최근 한진해운과의 합병설의 단초를 제공한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현대증권 매각이 불발된 이후였다"고 했다.

주채무계열이 주채권은행과 맺는 '재무구조개선약정' 또는 '자율협약' 제도는 대기업의 부실징후를 미리 발견해 내 부실화를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기업 경쟁력을 높일 뿐 아니라 은행 여신의 안정성도 도모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대부분 대기업은 이 제도에 따라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위법적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반영해 은행권 중심의 반강압적인 구조조정을 허용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기업 구조조정 제도다. 기업들은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은행권 간섭을 받게 돼 꺼려하지만 '기업을 살린다'는 취지에 공감해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이 제도는 최근 현대그룹 사례에서 보듯 '기업 죽이기' 제도가 되고 있는 게 문제다. 모든 변명을 들어주더라도 그 책임은 이 제도의 주요 실무은행인 산업은행에 1차적으로 있다는 지적이다.

동부그룹의 경우 10여년전부터 산업은행과 자율협약 또는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고 구조조정을 벌였으나 끝내 대부분의 제조업체가 매각되거나 해체됐다. 동부그룹 한 관계자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제 동부그룹은 '동부금융그룹'이라고 불러야 한다"며 "산은과 구조조정을 해 온 동부그룹 제조업체는 거의 한 곳도 남아있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재계 또 다른 관계자는 "동부의 책임도 있고 산은의 책임도 있어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구조조정 과정에서 산은이 보여준 태도, 그리고 산은이 내놓은 해법은 결과적으로 효율적이지 못한 해법이었다"고 말했다.

시장 일각에서는 동부그룹 오너 일가가 산업은행 주요 고위직들과 관계가 원만치 않아 은행권 눈밖에 나 버림을 받았다는 근거없는 해석도 나돈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그룹 계열 제조업체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주 산업은행과 반목해 왔다. 지금은 해체된 STX그룹도 비슷한 사례로 재계에서 회자된 바 있다.

물론 부실경영의 책임까지도 산업은행이 떠맡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계열주의 책임은 계열주가 져야 한다. 때론 경영권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선제적 구조조정의 책임은 산업은행이 져야 한다는 게 공통된 목소리다. 구조조정 기업이 산업은행의 제안을 잘 따라 왔다면 그에 따르는 '당근'도 함게 쥐어줘야 하는데 '당근'은 없고 '채찍'만 가득하다.

요즘 금융권과 재계의 최대 이슈가 되고 있는 현대그룹은 불과 몇개월 전만해도 '구조조정 모범 기업'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기업 반발에도 불구하고 산업은행은 3조원대 자구계획안을 밀어부쳤고 결국 현대그룹이 자구계획을 이행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계획을 성실하게 이행한 현대그룹을 도와 산업은행이 모종의 다음 스텝을 고민해야 할 때다.

하지만 현대증권 매각이 뒤틀리자 현대상선은 불과 수개월만에 '좀비기업'이라는 불명예스런 칭호를 우려해야 하는 수준이 됐다. 현대그룹은 '영구채' 발행 등이 필요하다며 산업은행에 제안했다. 현대증권 재매각도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나 이 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시중엔 정부 관계자 입을 빌려 '한진해운과의 합병안'이 나돌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해당 업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선제적으로 지금까지 구조조정을 해 왔고 결국 산업은행이 밀어부쳐 자구안을 맺고 실행했다"며 "한때는 모범기업이라고 하다가 갑자기 좀비기업 리스트에 올려놓는 것은 지금의 구조조정 제도 자체가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그는 "해당 기업이 뼈를 깍는 자구안을 이행하면 이후엔 도와주는게 상식아니냐"며 "해당기업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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