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3년 10월 16일 07:5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10년도 훨씬 지난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빅4 출신 회계사는 입이 삐쭉 나와 있었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말고 함께 고객사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오랜만에 대기업 거래 자문을 맡아 도와줬고, 잘 마무리됐는데 갑자기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하소연이었다.사정은 이랬다. 인수 완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객사 측에서 연락이 와서 '인수 후 통합(PMI)' 컨설팅 자료를 부탁했다고 했다. 아니 추가로 일을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반문했다. 문제는 이걸 공짜로 해달라고 했다는 점이다. 1억원이 넘는 리포트를 무료로 해달라고 하다니 강도가 따로 없다고 성을 냈다. 회계법인의 비애가 느껴졌다.
그 시절 회계법인은 자문 시장 내 입지가 '3순위'에 가까웠다. 단순 회계 자문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M&A 딜을 컨트롤하는 재무자문 업무를 맡기기에는 역량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어렵사리 큰 딜을 맡으면 또 고민이 시작됐다. 돈값을 해야 하다는 말과 함께 이런저런 부수적인 일을 맡겼다. 그 일도 감지덕지했던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수고를 감내해야 했다.
그 저변에 회계법인의 자문 역량이 메이저라 불리는 외국계 IB에 비해 떨어진다는 인식이 깔려있었다. 외국계 IB는 그렇다 치더라로 국내 금융사 M&A팀에도 밀렸다. 금융사들은 파이낸싱 측면에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회계법인은 그에 상응하는 별다른 무기가 없었다. 말 그대로 샌드위치 신세였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서일까. 와신상담, 이를 갈았던 탓일까. 요즘 M&A 자문시장에서의 회계법인 위세를 보면 가히 놀랐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당장 지난해 더벨 M&A 재무자문 리그테이블에서 삼일PwC가 사상 처음으로 1위를 기록했다. 회계법인이 재무자문 분야 수위를 차지한 것은 리그테이블 집계 이래 처음이었다. 여기에 삼정KPMG도 2위에 오르면 회계법인 전성시대를 함께 열었다.
올해 기세도 매섭다. 삼일PwC는 6조원이 넘는 재무자문 실적을 쌓으면 1위 자리를 공고히 지키고 있다. 삼정KPMG 역시 5위를 차지하며 호시탐탐 최상위권 진입을 노리고 있다.
오랜 기간 쌓아온 자문 역량과 기업 네트워크, 전문가 양성 노력이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배움의 단계를 거쳐, 증명의 시험대를 통과해 이제는 인정의 영역으로 들어선 모습이다.
회계법인 내 M&A 업무를 담당하는 재무자문부문의 위상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당장 빅4 기준으로 전체 매출에서 재무자문부문 실적이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육박하고 있다. 십여 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수치다. 빅4 중 누구할 것 없이 자문 역량 강화에 힘을 쏟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사와 세무 등 전통 비즈니스의 한계가 명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성장의 동력으로 더욱 부각되고 있다.
맨파워도 눈에 띈다. 홍종성 딜로이트안진 대표이사가 대표적이다. M&A 전문가로서 처음으로 빅4의 수장 자리를 꿰찼다. 김이동 삼정KPMG 재무자문부문 대표는 최근 회사 최연소로 부문 대표가 됐다. 2021년 부대표 자리에 오른 지 2년 만에 초고속 승진 훈장을 달았다.
이제 그 누구도 회계법인을 싼 맛에 쓰는 '티어3' 플레이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공짜 리포트를 쓰던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누구나 일정할 만한 위치로 올라섰다. 회계법인들의 활발한 자문 활동 덕분에 M&A 시장의 외연과 규모가 더 커지고 있다. 회계법인의 진화가 반가운 이유다.
헝그리 정신으로 성장한 회계법인의 야망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더욱 고도화된 전문성으로 경쟁력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보여줄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안다. 그 야망의 끝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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