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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판결문 뜯어보기]에피스로 시세조종? 어떤 조작도 없었다⑤합병 유리한 나스닥 상장 발표, 검찰 "허위사실 유포" vs 법원 "실체적 진행 증거"

이상원 기자공개 2024-02-29 07:22:37

[편집자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1심 재판에서 이재용 회장의 무죄가 확정됐다. 덕분에 삼성은 '국정 농단' 사태부터 7년여간 이어졌던 총수의 사법 리스크를 당장은 벗어나게 됐다. 비록 검찰이 항소를 했으나 재판부가 19개 모든 혐의에 '무죄'를 준만큼 2심 선고의 변동성도 크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이런 가운데 재판부가 삼성의 손을 완전히 들어준 까닭이 무엇인지도 관심을 끈다. 더벨이 입수한 해당 판결문에는 합병 과정에서 이 회장과 삼성의 어떠한 위법행위도 없었다는 재판부의 메시지가 명확히 담겨 있었다. 1589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판결문을 뜯어본다.

이 기사는 2024년 02월 28일 13:1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총 표 대결에서 삼성은 주주들의 70% 찬성을 받아내며 승리했다. 다만 합병 실패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던 것은 아니었다. 30%에 달하는 반대를 무시할 수 없었다. 주식 매수청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합병 계약상 주식 매수청구가 주식매수 대금 한도를 넘어서면 합병계약 해제 사유에 해당한다.

이에 앞서 제일모직 자회사였던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의 기업설명회가 열렸었다.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에피스) 대표는 이 자리에서 삼성바이오 자회사인 에피스의 나스닥 상장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 최초의 미국 증시 상장일뿐 아니라 당시 바이오에 대한 투자 열기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 상장을 철회했지만 성공했다면 삼성의 상징적인 딜이 되기에 충분했다.

몇 년 뒤 합병 관련 문제로 관계자들을 기소한 검찰은 에피스의 나스닥 상장 추진 과정에 숨겨진 부당행위가 있었다고 봤다. 시세조종 등의 범죄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삼성물산·제일모직의 안정적인 합병 성사를 위해 주총 전후 인위적으로 주가를 부양하는 수단으로 에피스를 활용했다고 봤다.

◇주총 승리에도 불안했던 합병, 에피스 상장 놓고 엇갈린 주장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계약상 주식매수 대금 한도액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각각 1조원, 5000억원이었다. 주식 매수청구가 이 금액을 초과할 경우 합병계약 해제 사유에 해당된다. 반대 주주들의 지분을 사들이면서 재무적 부담이 가중될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명분 부족으로 합병을 강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회사는 2개월 내 주식 매수청구권을 행사한 주주의 주식을 매입해야 한다. 매수 가격은 협의를 통해 결정되거나 60일간의 평균 가격으로 정해진다. 다만 30% 이상의 주주가 반대할 경우 다시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주가 하락기에는 매수 가격이 시가보다 높게 형성되고 주가 상승기에는 낮게 나타난다.

주총 전날까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에 접수된 합병 반대 의사 통지 주식수는 지분율로 각각 15.97%, 0.9% 수준이었다. 주식매수 대금으로 계산하면 총 1조6542억원으로 이미 한도액을 초과했다. 주식매수 청구 기간에 주가 변동에 따라 주식매수 대금 한도액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하지만 주가 흐름이 삼성 측에 유리하게 흘렀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주가는 엘리엇과의 주총 표 대결을 앞두고 계속해서 상승하는 추세를 이어갔다. 정작 합병이 승인되자 3거래일 연속 주가가 하락하며 주식매수 가격에 근접하게 떨어졌다.

검찰이 주목한 건 이 부분이다. 검찰은 삼성 측이 합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인위적인 주가 부양에 나선 것으로 봤다. 주가가 올라야만 주식 매수청구권 행사가 최소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활용 수단으로 내세운 게 에피스 상장이었다고 판단했다. 이 시기 삼성은 에피스의 나스닥 상장 추진 계획을 공표했다. 검찰은 주총 전후 삼성물산·제일모직의 주가를 부양할 목적으로 상장 준비 작업에 착수한 것처럼 위장한 것이라고 봤다. 2016년 상반기 상장이 성사될 것처럼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에피스가 당시 상장을 위한 선결 조건조차 갖추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해당 선결 조건은 에피스 지분 50%-1주를 보유한 바이오젠과 콜옵션 행사 여부 및 지분 매각에 대한 합의였다. 모든 지분을 삼성이 인수해야만 상장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정작 삼성과 바이오젠 간 이에 대한 협의는 에피스 상장을 발표할 당시까지도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게 검찰 주장이다.

반면 삼성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추진을 결정하기보다 훨씬 앞서 에피스 상장을 추진해 왔다는 입장이다. 나스닥 상장을 위한 객관적인 여건도 모두 갖춘 상황에서 상장 계획을 발표하고 주관사 선정을 위한 제안요청서(RFP)를 발송한만큼 관련 사안은 허위가 아니라고 했다. 검찰이 제시한 선결 조건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계획 발표 당시 모두 충족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옥

◇삼성, 증권사 통해 요건충족 여부 검토…발표 당시 상당히 '진척'

첨예하게 갈리는 양측의 주장을 놓고 재판부는 에피스 상장 계획 발표가 합리적 근거를 갖췄는지 여부를 살펴봤다. 그 결과 법원은 삼성이 상장을 진지하게 추진했고 당시 상장의 객관적인 여건도 이미 갖춘 것으로 결론 내렸다.

해당 판결의 근거로 재판부는 삼성이 제출한 협의, 미팅 기록을 제시했다. 상장 계획 발표 약 1년 전인 2014년 8월 삼성증권과 에피스 상장을 논의했고 이때 국내와 함께 미국 주식시장 상장도 검토됐다는 기록이다. 삼성은 이와 관련된 이메일 기록도 갖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씨티증권이 삼성의 의뢰를 받고 상장 요건 검토 문건을 작성했다. 씨티증권은 에피스가 나스닥 상장을 위한 객관적 요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거나 충족할 수 있을 것이란 의견을 전달했다. 씨티증권 내부 이메일에도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이 바이오젠 대표에게 나스닥 상장 검토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검찰은 '상장 선결조건'인 주요 주주 바이오젠과 주식 매입 협의 관련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에피스의 나스닥 상장 계획을 발표하던 시기에서야 비로소 삼성과 바이오젠이 지분 매각 등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고 봤다. 이외에 그 어떠한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검찰 측 주장이다.

하지만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시기 바이오젠과 협의가 상당한 진척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에피스는 미국계 로펌 Paul Hastings를 중심으로 주관사와 협의해 증권신고서를 준비했다. 2015년 10월 신고서 초안을 삼성과 주관사단이 회람했다. 이후 보완 작업을 거쳐 그해 말 증권신고서를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에 발송할 서신까지 준비했었다.

또한 이때 당시 바이오젠과 구체적인 지분 매각에 대한 실무 협의도 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판결문에 따르면 바이오젠은 상장 전 콜옵션 행사, 지분 매각 동시 추진을 선호한다는 입장을 삼성에 전했다. 2015년 9월 바이오젠과 지분 매각 방안에 관한 협상을 진행해 매각 구조와 가격에 대해 잠정적으로 합의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법원은 "에피스 나스닥 상장은 장기간 진지하게 검토, 추진해 온 것으로 공표와 RFP 발송 당시 상장 추진 여건이 충족됐었고 상장의 객관적 선결 조건인 바이오젠의 동의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검찰이 주장하는 선결 조건에 대해서도 충분한 협의와 동의가 있었다"며 "이를 보더라도 중요 사항의 부실기재, 위계 또는 부정한 수단 등의 사용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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