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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모 LG 회장의 '온고지신' [thebell desk]

박상희 차장공개 2021-11-01 07:36:31

이 기사는 2021년 10월 29일 07:4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어느덧 코끝 시린 계절을 마주한다. 기업들은 한 해 성과를 점검하면서 본격적인 인사 시즌에 돌입했다. 동시에 내년 대내외 경제 이슈를 살피면서 사업 전략을 짜느라 분주하다. 다음달 열리는 더벨 경영전략포럼을 준비하면서 여러 경제연구소와 컨설팅펌 관계자들에게 내년 경제 전망과 기업의 대응전략을 자문했다.

예기치 못한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기업 경영 현장에서 ‘태풍의 눈’처럼 여겨졌던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벌써 ’올드패션(old-fashioned)'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06년 UN에서 발간한 ‘책임투자 원칙’이라는 리포트에 처음 등장한 ESG의 개념 자체는 항구적으로 차용되겠지만 경영 전략 차원에서의 ESG는 벌써 구문이라는 것이다.

좁은 땅덩어리에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은 유독 트렌드에 민감하다. 유행의 지속기간이 유달리 짧기도 하다. 이러한 특성은 경영 전략에서도 예외가 아닌 듯 싶었다.

재계 총수 가운데 한 발 앞선 감각으로 경영 전략 트렌드를 제시하는 인물로 꼽히는 이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다. ESG와 맥을 같이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개념을 몇 년 전 선제적으로 도입했고 당초 금융회사의 투자 가이드라인이었던 ESG를 경영 전략으로 주창했다. ESG는 기업의 비재무적 요인(non-financial factors)을 살핀다는 의미인데, 정작 ESG가 재계에서 유행처럼 번지자 역으로 ‘파이낸셜 스토리(financial story)'를 써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최 회장과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이다. 최 회장이 신선한 개념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메시지를 설파한다면 구 회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언제나 한결같다. 2018년 LG그룹 4대 총수에 오른 이후 구 회장이 줄곧 강조해 온 메시지는 ‘고객 가치’다.

LG그룹은 지난달 말 비대면 화상회의로 사장단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재무지표 목표가 사업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면서 “첫 시작부터 고객 가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의 LG를 만들어 준 근간이자 LG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고객이다." "LG의 혁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객 가치를 높이는 일에 철저히 집중된 것이어야 한다." 구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객 가치’를 강조한다. 다만 ‘고객 가치’는 그만의 고유한 언어는 아니다. LG그룹의 오랜 전통이자 부친인 고(故) 구본무 회장이 평생의 경영 원칙으로 삼아온 것이기도 하다.

가상화폐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현실 너머 세상을 의미하는 메타버스(metaverse)가 유행하는 시대에 ‘고객 가치’라는 단어는 다소 고루하게 느껴지는 측면도 없지 않다. 1978년생으로 재계 총수 가운데 젊은 축에 속하는 구 회장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 자체가 전하는 느낌보다도 그 메시지의 효용성일 것이다.

LG전자가 3분기 매출액 18조원을 돌파하며 역대 최대 기록을 달성했다. '실적 효자' 역할을 하는 생활가전(H&A사업본부)이 3분기에 월풀을 꺾으며 처음으로 '연간 1위'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역시 호실적을 달성한 삼성전자가 반도체와 휴대폰 ‘양 날개’로 날았다면 모바일 사업을 접은 LG전자는 가전제품 사업 하나만으로 세계 시장을 평정한 셈이다.

월풀은 세탁기에서 냉장고, 에어컨 등 이른바 백색 가전 세계시장에서 압도적 우위를 지켜온 글로벌 기업이다. 올해 설립 110주년을 맞은 월풀이 1958년 부산에서 ‘금성사’라는 상호로 출발한 LG전자에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내놓았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는 뜻이다. 세계 가전 시장을 호령하는 LG전자의 질주를 보니 구 회장의 '고객가치' 메시지가 더 이상 고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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