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3년 04월 20일 07:5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예전 언론사 수습기자 전형 과정에서 한 시중은행 주주총회 기사 작성 미션을 받았다. 주총장은 처음이라 못 알아듣는 말이 더 많았는데 정체 모를 주주가 "의장! 찬성합니다!"를 외쳐대는 통에 싱겁게 끝날 조짐이었다.국회의원 공천설로 논란이 된 당시 이 은행의 행장은 별 말이 없었다. 취재에 응해준 주주 두어명은 주가도 낮은데 행장이 딴 궁리를 한다며 잔뜩 화가 났지만 주총장에선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과제는 졸고가 돼 감독관 선배에게 핀잔을 들었는데 운 좋게도 글밥을 먹고 있다.
금융부 기자가 된 지금 돌아보면 7년 전 취재한 주총 현장은 소유분산 기업의 전형이었다. 통상 금융회사 경영진은 각종 논란과 주가 부진에 대한 설명을 정제된 언어와 숫자로 갈음한다. 지분율이 낮은 개별 주주는 경영진을 추궁하기가 마땅치 않다. 라이선스 비즈니스인 금융업으로 누리는 권한은 무겁지만 의식할 오너가 없는 CEO의 책임은 가볍다.
지난달 찾은 JB금융지주 주총장에선 은행의 주인을 가려볼 흔치 않은 기회가 있었다. JB금융은 2대 주주인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와 분쟁 국면에 있다. 저마다 할 말 많은 경영진, 이사회, 노동조합, 주주가 뒤엉켜 긴장감이 고조됐다. 표면적인 갈등 이유는 배당 성향 이견이지만 본질은 헤게모니 다툼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어 날선 말이 오갔다.
혼란스러운 현장을 정리한 건 김기홍 JB금융 회장이다. 김 회장은 마이크를 잡고 주주들의 배당 정책, 지배구조 비판에 빠짐 없이 답했다. 얼라인파트너스가 배당 확대를 요구했을 땐 장장 40분 간 자본배치 전략을 설명했다. 원고 없이 자본적정성, 수익성 관리 구상을 밝히며 좌중을 압도했고 모든 안건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김 회장의 명성을 확인시켜준 무대였다. 그는 어지간한 숫자를 전부 외워 설명하는 화법으로 유명하다.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시절 두툼한 자료집에서 숫자 오류를 찾아내 실무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곤 했다. KB금융지주 사외이사일 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소신파로 정평이 났다. 매사 거침 없는 그에게 금융권은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였다.
불도저식 리더십 만으로 주주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아니다. 리더십을 넘어 선 오너십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김 회장은 주주들 앞에서 스스로 세운 전략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배당을 더 늘리기보다 성장세를 유지하고 자본력을 보강할 수 있게 해달라고 오히려 주주들을 설득했다. 오너가 아니지만 오너십을 갖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주장이다.
은행의 주인을 가리는 논쟁은 금융권 전반에서 벌어지고 있다. 금융 당국은 은행이 공공재라고 주장하며 제도 개선에 나섰다. 하지만 공기업으로 전환하지 않는 한 오너가 없는 소유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오너를 둘 수 없다면 경영진의 강력한 오너십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김 회장의 오너십 경영은 금융권의 모범 사례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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