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bell interview/CEO를 사로잡은 예술]응접실 벽난로 위를 차지한 '살바도르 달리'의 판화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 "미술 정책 관여한 일이 가장 큰 보람"
서은내 기자공개 2025-01-17 08:11:42
[편집자주]
예술 작품에는 무한한 가치가 녹아있다. 이를 알아본 수많은 자산가, 기업가들의 삶에서도 예술은 따뜻한 벗으로서 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더벨은 성공한 CEO들이 미술품 컬렉터로서 어떻게 미술의 가치를 향유하는지, 그의 경영관, 인생관에 예술품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인터뷰를 통해 풀어봤다.
이 기사는 2025년 01월 16일 09시23분 thebell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미술품 컬렉터는 시장을 움직이는 중요한 축이다. 하지만 대개 공개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은 달랐다. 한국 문화예술 발전을 바라며 후원계의 대부로 나섰다. 물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정책 기관이나 정부 산하 조직의 핵심 멤버로서 예술계 성장에 필요한 목소리를 내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김 회장은 현재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메세나협회 회장, 현대미술관회 회장,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재단 이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세종솔로이츠 명예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국내 미술계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 국립현대미술관 등은 공적 성격을 갖는 기관들의 중추인 곳이다.
1980년대부터 미술품 컬렉팅을 시작한 김 회장의 소장품은 1000여점에 달한다. 현재 벽산엔지니어링 사옥 곳곳에 400여점의 작품이 놓여있으며 700점 정도는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김 회장의 컬렉션은 한 개인 컬렉터의 수십년 여정과 취향이 반영된 자산이면서, 연륜이 깊은 한국 대표 컬렉터가 선택한 문화적 유산으로 평가된다.
김 회장은 인터뷰 도중 "미술품 컬렉션을 만드는 것은 큰 만족감을 주는 일이지만 그보다 미술정책에 관여하는 것이 훨씬 보람된 일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기업가의 눈으로 보기에, 미술시장 발전과 문화예술의 성숙을 위해서는 한 차원 실행력 높은 정책이 지름길이 될 것으로 내다본 셈이다.
올해로 78세를 맞은 김 회장은 "그동안 맡아온 문화예술계의 자리들을 이제 후배들에게 넘겨야 하는 시기가 됐다"면서도 인터뷰 내내 문화예술계를 향한 예리한 비판과 쓴소리를 가감없이 쏟아냈다.
때로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예술계의 강력한 패트런으로서 그의 비판 속에는 따뜻함과 냉철함이 동시에 담겨있었다.
컬렉팅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 김 회장은 "그동안 여러 컬렉터들을 만났을텐데 뭐라고 하던가"라며 되묻기도 했다. 뒤이어 "컬렉팅이 돈이 안된다 얘기하는 사람은 거짓말일 것"이라며 "누구나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있고, 일단 컬렉팅은 남의 돈을 꿔서 하면 안되고 여유 자금으로 하는 게 정석"이라고 말했다.
Q.컬렉팅을 지속하는 동력이 무엇인가.
A.작품을 살때 짜릿한 즐거움이 있다. 비싼 작품을 사려면 그만큼 더 연구도 하고 책도 뒤져야 한다. 보통 미술관에서 전시할 만한 좋은 작가는 전시 후 가격이 좀 오른다. 물론 아닌 것도 있다. 소장품 중 까를로스 크루즈 디에즈의 일루전 작품이 있다. 그는 베네수엘라 사람인데 5년 전 쯤 작고했다. 그의 작품 곁을 지나면서 색이 다르게 보이는 건데 대부분 작품 가격이 수십만달러 이상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가라지 미술관'에 가면 계단에서부터 전부 그의 작품이 놓여있다. 색이 귀신같다. 지난해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전시했는데 가격이 오르진 않더라.
대부분 소장품마다 스토리텔링이 있다. 회사 사옥에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사무실에 들어오는 분들이 그 스토리를 재미있어 한다. 커피잔 하나에도 구매하게 된 배경이 있듯. 작품에 대한 감흥은 주로 설치된 공간 자체가 위주가 되며 가격이 위주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 집 스타일은 미니멀도 아니고 클래시컬하지도않다. 집에는 주로 그 분위기에 맞는 조각들이 놓인다. 회사가 건설업종인데에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니 사무실에는 더 밝고 화려한 것들을 놓는다. 그 작품들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다.
Q.사로잡힌 첫 예술품의 매력은 어떤 것이었나.
A.가장 최근에 산 것이 가장 색다르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예술품은 뭐가 더 낫다 기준이 있는게 아니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어릴 때 좋아하던 걸 지금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없듯 시간이 흐르고 환경, 지혜, 경험을 통해 취향이 변해간다. 비싼걸 꼭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비싸지 않게 준 것이 지금은 가장 비쌀 수도 있다.
연륜이 있다보니 좋아하는 스타일이면 충동구매도 하게 된다. 그런데 소장 작품의 수가 많아지면서 벽에 걸지 않게 되면 사실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수장고에 들어가는건 죄악이라 생각한다. 회사에서 일할 때에도 락커에 집어넣는 서류는 다시 보게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지금처럼 바쁜 세상에 옛날 서류를 꺼내볼 일이 있겠나.
Q.특별한 감흥을 얘기해 줄만한 작품이 있다면.
A.컬렉팅 초기에 산 살바도르 달리의 판화다. 나는 크리스쳔으로 태어났다. 두손갤러리에서 산 것인데, 서울대 미대를 나온 내 후배 김양수 씨가 대학로에서 갤러리를 했다. 달리 작품으로 여러 점을 샀다. 적갈색을 비롯해 초록색, 흑회색 등 세 가지 였다. 적갈색을 택해서 우리집 응접실 벽난로 위 정중앙에 걸었다. 봤을 때 굉장히 뭔가 와닿았다. 안정감 있고 편하고. 어떨 땐 기도하게 된다. 집 구조가 달라져 지금은 계단에 걸었다. 미디어 작품도 좋지만 집안에 두기가 굉장히 힘들다. 틀어놓고 있기 어렵다. 그에 가장 가까운 것이 홀로그램이다.
Q.미술관을 만들 계획은 없는지 궁금하다.
A.젊은 시절 잘 모르고 양평 가평에 미술관을 지으려 알아보기도 하고 설계도 한 적이 있다. 보안이 취약할 수 밖에 없는 그 외곽 지역에 누가 관장을 맡으려 하겠나. 사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미술관 얘기를 하는 거다. 컬렉션은 결국 개인의 명예일 뿐 언젠가는 다 두고 가야한다. 미술관을 굳이 할 이유가 있을까. 보통 다른 대안이 없어서 재단에 두고 미룰 뿐이다.
물론 작품이 있으니 돌려가며 전시 프로그램을 짤 수는 있을거다. 미술관의 기본은 구입하든 빌리든 신작을 계속 선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이 너무 비싸고 넓은 공간과 전기요금, 인건비까지 연간 수십억원 이상이 든다. 컬렉터들이 미술관도 지어주고 작품까지 다 자녀에게 준다해도 사실 그 뜻을 잇기 어렵다보니 1세대에 끝난다. 신작을 지속 구입할 엄청난 재단이 있지 않는 한 미술관 만들면 고생만 많이 하고 결국 처분해야 한다.
과거 미국도 2008년 뮤지엄들이 다수 문을 닫았다. 창립자의 좋은 뜻을 이어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기업에 속한 미술관은 위험하다. 영원히 가는 회사가 없다. 컬렉션이 대를 잇기 어렵다면 일본의 사례가 선순환이 가능한 참고사례라고 생각한다. 과거 일본에서는 나고야의 한 건설 재벌이 시를 대상으로 '티파니 앤 잉글리쉬가든'이란 공모를 냈다. 미술관 건립 비용도 내고 작품도 줄테니 이를 수용할 곳을 공개모집한 것이다. 요나고라는 지역이 당선됐고 예쁜 건물이 완성됐다. 나오시마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모두 그 해당 지역에서 운영한다. 개인 소장 미술관은 시간이 지나면 초라해지기 쉽다.
Q.국내에 개인 미술관도 많지만 국내에 공공미술관도 많다.
A.우리나라에 80개의 공공미술관이 있다. 국립미술관만 10개에 시립, 도립, 구립까지 있다. 성북구에만 4곳이다. 그런데 지방 미술관 중에는 외국 작가 작품이 하나도 없는 곳이 많다. 구색을 위해 지자체들이 저마다 미술관을 만든다. 해당 지역 출신 작가 등의 작품을 기증받곤 하는데 제대로 된 운영이 어렵다.
국공립미술관들은 수장고를 없애야 한다. 계속해서 국립 미술관들은 새로운 작품을 사모으고 있는데, 그러다보면 옛날 것은 수장고로 들어가 다시 나올 기회가 적어진다. 그렇게 청주, 대전 등 수장고만 계속 짓게 된다. 대신 영세한 많은 지방 미술관들과 소장품을 주고받으면 된다. 미술관은 소장품이 많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소장품은 전시가 목적이 돼야 하며 단순히 소장 자체가 목적이 돼선 안된다. 미술관들끼리 의논해서 서로 소장품을 순회하며 전시해도 좋다. 그렇게 되면 꼭 해외 미술관으로 나갈 것이 아니라 지역 미술관들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또 안타까운 것 중 하나가 지난해 시행된 미술품 물납제를 이용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컬렉터로부터 작품을 기증받고 세제혜택을 비롯해 일정한 혜택을 주는 방식이 문화 선진국들이 하는 방법인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작품들을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곳에서 모아서 국가별 장르별 등으로 정리해서 지방 미술관에 보내면 된다.
Q.문화예술 기관들을 통해 정책 제언을 많이 한 것으로 안다.
A.나는 미술 컬렉션 보다도 미술 정책에 관여하는 것이 가장 보람됐다. 한국은 예술을 정부가 주도하는데 사실 정부는 돕는 것이 맞다. 우리나라 만큼 오로지 국민 세금으로 문체 분야 전체를 키우는 곳이 드물다. 문화예술 강국들은 기업도 아닌, 민간의 개인 이사들이 보드멤버가 된다. 경기가 들쑥날쑥하면 기업들은 기금을 내기 어렵고 운영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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