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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60년 히스토리]‘건설 종가’ 현대건설, 왕좌 복귀는 언제쯤④40여년 아성, 부도 이후 균열…탈환 성공했으나 2014년 2위로

고진영 기자공개 2021-09-14 07:46:16

[편집자주]

건설업계에선 해마다 시공능력을 줄세우는 성적표가 매겨진다. 항목별 점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업계의 '파워 시프트(Power Shift)'를 짐작해볼 수 있는 연례 이벤트와 다름없다. 특히 대형사들에게는 상징성 싸움이자 자존심 문제로도 의미가 있다. 도입 60년, 시공능력평가를 통해 시장의 판도 변천사를 되짚어봤다.

이 기사는 2021년 09월 10일 08:1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국내 최초 단지형 아파트는 현대건설이 지었다. 10개동에 642가구 규모의 마포아파트. 1964년 열린 준공식에 대통령까지 참석했다. 1970년대에는 ‘강남 부촌’을 상징하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건축하면서 대규모 공동주택의 패러다임을 열었다.

대형공사 역시 대부분 현대건설의 손을 거쳤다. 1960년대 2대 토목공사 중 하나인 소양강 다목적댐을 시공했고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뚫었다. 한강에 놓인 다리 33개 가운데 12개가 현대건설 작품이다. 자타공인 업계 ‘맏형’으로 불렸으나 시평 순위는 2인자로 밀려난지 꽤 오래됐다.

◇'건설 종가(宗家)'의 시작, 42년간 시평 1위 독주

현대건설은 1947년 5월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설립한 현대토건사에서 출발한 회사다. 그 뒤 1950년 1월 현대자동차공업사와의 합병으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사실상 범현대그룹의 모체와 다름없다.

1962년 첫 시공능력평가(도급한도액) 순위가 발표됐을 당시 현대건설이 당연한 듯 1위를 차지했다. 이후 2000년대에 오기까지 40여년간 현대건설의 아성은 굳건하게 이어졌다.

그러나 견고하게만 보였던 독주체제는 이미 금이 가 있었다. 균열의 원인은 해외사업이었다. 1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현대건설은 1975년 중동에 진출해 이라크에서 줄줄이 공사를 따왔다. 회사 내부에서 ‘리스크가 가장 높은 나라’라는 분석이 있었는데도 올인을 감행한 대가는 무겁게 돌아왔다.

1991년 걸프전이 터진 탓이다. 1조원 이상의 이라크 미수금이 현대건설의 목을 죄어왔다. 이 돈을 대손 처리하지 않고 숨겨온 현대건설은 2000년 결국 1차 부도를 맞았다. 그 해 당기순손실은 무려 3조원에 육박했다. 설상가상 2000년 이른바 ‘현대가(家) 왕자의 난’까지 겹치면서 현대건설은 이듬해 현대그룹에서 떨어져나왔다.


위태해진 현대건설의 입지는 시평 순위에서도 나타났다. 2004년 삼성물산이 1위로 뛰어오르며 왕좌를 차지했다. 평가항목 중 공사실적과 기술평가 점수를 모두 현대건설이 압도하면서 삼성물산을 두고 ‘어부지리’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회계기준 변경과 삼성전자 주식평가이익의 급증 등 외부적 변수가 삼성물산 집권에 절대적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는 승리, 패배는 패배였다.

더군다나 당시 현대건설은 두 차례의 감자로 인해 경영평가의 핵심 지표인 실질자본금이 동종 메이저업체들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재무건전성 회복이 시급한 과제인 것은 분명했다. 2005년에는 급기야 대우건설에 밀려 3위로 내려앉았다.
2006년 현대건설 TV 광고
심한 부침을 겪던 현대건설은 2003년 이후 부실채권을 현금화하면서 다시 기초체력 쌓기에 들어갔다. 지속적인 자구노력 끝에 2006년 마침내 채권단 관리에서 벗어나 자율경영체제로 전환했고 부활의 시동을 걸었다.

현대건설의 아파트 브랜드 ‘힐스테이트’ 역시 2006년 론칭됐다. 당시 내놨던 TV 광고에는 현대건설의 자부심과 재도약의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옛 신문기사로 시작된 광고 화면에선 ‘현대건설(現代建設), 아파트 시대를 열다’라는 제목과 함께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 모습이 지면을 채운다.

◇현대차그룹서 열린 제 2막, 왕좌 되찾다

절치부심 끝, 두 번째 전성기가 찾아왔다. 채권단 아래서 보수적으로 사업을 펼친 게 전화위복이 됐다. 다른 대형 건설사들은 2000년 이후 ‘아파트 버블’에 주택사업 비중을 40% 안팎까지 높였지만 현대건설은 20% 수준에 그쳤다. 일부 건설사들이 대규모 미분양에 발목이 잡힌 것과 달리 현대건설은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었다.

실적개선이 두드러지면서 2008년 현대건설은 수주와 매출, 영업이익 전부 업계 최고를 기록했다. 이때 매출은 7조2711억원이었는데 연간 매출이 7조원을 넘어선 것은 현대건설이 국내 건설사에서 처음이었다.

마침내 2009년 별러왔던 왕좌 탈환에 성공했다. 대우건설을 밀어내고 6년 만에 시평 1위를 되찾았다. 이듬해는 현대차그룹에 편입되면서 다시 범현대가의 울타리로 돌아갔다.

“꿈만 같다.” 2011년 4월 1일 현대건설 계동 사옥으로 10년 만에 출근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감회였다. 앞서 산업은행이 2010년 매물로 내놓은 현대건설을 두고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은 치열한 인수전을 벌였다. 당초 현대그룹이 우협으로 선정됐으나 대출계약 등의 문제로 현대차그룹에 권리가 넘어갔다. 현대건설을 인수하면서 현대차그룹은 정주영 회장 시절 현대그룹의 정통을 이었다는 명분을 얻었다.

현대건설은 승승장구를 계속했다.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네트워크 지원을 바탕으로 신시장 진출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2011년 말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복합화력 발전소 공사, 2012년 베네수엘라 푸에르토 정유공장, 콜롬비아 베요 하수처리장을 잇달아 수주하며 중남미 건설시장 재진출에 성공했다. 여세가 이어진 2013년에는 업계 최초로 누계 해외수주액 1000억 달러 돌파의 금자탑을 쌓았다.

◇다시 지각변동, 삼성물산의 추월

그러나 라이벌 삼성물산의 꾸준한 상승세를 따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2014년 현대건설과 삼성물산은 나란히 전년 실적을 훌쩍 뛰어넘는 상반기 실적을 발표했다. 현대건설은 쿠웨이트 자베르 코즈웨이 해상교량과 UAE 사브 해상원유처리시설 공사, 삼성물산은 호주 로이힐 광산과 래미안 강남 힐즈 공사 등이 그 배경이었다.

시장에선 시평 지각변동의 가능성을 점쳤고 결국 2014년 1위는 삼성물산이 차지했다. 그간 삼성물산의 약점이었던 토목건설 실적을 로이힐 프로젝트가 끌어올린 덕분이 컸다. 2015년에도 삼성물산이 집권을 유지했으며 시평액 차이는 전년 5500억원 수준에서 4조원 정도로 8배나 더 벌어졌다.

올해의 경우 현대건설은 평가항목 중 공사실적평가액 차이를 전년 약 1조3000억원에서 7000억원 정도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2020년 토목건축 공사실적이 종합건설사 중 최고였던 영향이 컸다. 그러나 경영평가액 격차가 3배 이상으로 벌어져 이를 좁히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건설종가’의 자존심은 기술 분야에서 지키고 있다. 기술능력평가액만은 현대건설이 여전히 1위를 유지 중이다. 올해 기준 기술능력평가액은 1조7616억원으로 업계 최고였으며 보유 기술자수 역시 5080명으로 업계에서 유일하게 5000명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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