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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따로 '철학' 따로…투자수익 뒷전 '딜레마' [국민연금의 선택은]④'외부전문위' 책임회피 수단 전락, 해외서도 찾아보기 힘들어

김장환 기자공개 2015-07-10 11:04:00

이 기사는 2015년 07월 10일 10:1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1988년 탄생한 국민연금은 '강제적인 은퇴상품'으로 불린다. 만 60세 이상 가입자가 퇴직 등으로 소득원을 상실했을 때 쌓아놓은 연금으로 안정적 노후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주기 위한 복지적 목적을 운용 근간으로 한다. 5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는 무조건 가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직장인들은 대부분 가입 대상이 되고 있다.

강제적 성향을 띈 만큼 국민연금의 수익성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직장 생활 시작과 동시에 은퇴까지 수십년 동안 연금을 부어야 하고, 당장의 수익률이 곧 노후에 자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을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잣대가 되곤 한다. 현재 수준에서는 2060년 연금이 고갈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와 수익률 제고가 시급하다는 평가가 많다.

이를 뒤로하고 최근 국민연금은 투자 수익과 동떨어진 의사결정을 내놓아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SK C&C와 SK의 합병에 '반대표'를 던진 일이다. 지난달 24일 국민연금은 '합병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합병비율, 자사주 소각 시점 등이 SK 주주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양사의 합병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정작 국민연금은 SK와 SK C&C 양쪽 지분을 모두 가진 주요 주주로 올라 있었다. 투자자로서 합병이 주는 이익만을 놓고 봤을 때는 찬성 의결로 힘을 보태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무엇보다 합병 의결을 앞두고 이어진 양측 회사의 주가 흐름은 주식매수청구권 가격보다 크게 높은 수준이었다. 더구나 연기금의 찬반 결정에 큰 힘을 미친다는 국제 자문기구 ISS도 합병 찬성 권고를 내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졌던 것은 이중적이자 기형적인 의사결정 구조에서 기인된 것으로 풀이됐다.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에서 의결권 찬·반을 결정한 것이 아닌, 외부 전문위원으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의결권위)에 결정을 떠넘겼기 때문이다. 의결권위는 김성민 한양대 교수(위원장)를 필두로 정부, 근로단체, 연구기관 등에서 추천한 민간 전문가 9명으로 구성돼 있다.

의결권위가 첫 발족한 것은 지난 2005년이다. 국민연금은 당시 채권 중심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주식 등 위험 자산으로 재편하면서 각종 안건들에 대한 객관성 확보 수단으로 의결권전문위원회 제도를 선택했다. 가령 수익성을 담보할 수 없는 위험 자산 투자를 당사자간의 로비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하지만 정작 최근의 의결권위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책임 회피 수단을 위한 선택적 사안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투자 손실이 발생할 우려가 상존하거나 감사원 감사 과정에서 향후 책임 공방이 벌어질 수도 있는 민감한 투자 사안들에 대한 결정 권한을 외부 전문가들에 떠넘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의사결정 전반을 완전히 외부 전문기관으로 넘기는 사례는 해외 연기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다. 일부 해외 연기금들의 경우 외부 전문가들을 선정해 의사결정에 자문을 구하는 경우는 있지만, 찬·반표 자체를 외부인들을 통해 전면 결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를 이유로 국내에서도 의결권위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문제는 의결권위의 결정이 투자 수익을 우선시해야 하는 국민연금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과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SK와 SK C&C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작 반대표를 던졌지만 이를 통해 확보한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지 여부는 또 별개다. 안건 자체에 대한 찬·반 결정은 의결권위가 하지만 주식매수청구권 등은 기금운용본부에서 별도로 결정되는 사안이다. 반대표를 행사한 국민연금이 주식매수청구권은 행사하지 않고 주식을 담아두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압도적인 동의를 얻어 국민연금의 반대표가 합병 자체에 힘을 행사할 수 없었을 경우의 얘기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찬·반 결정을 앞둔 국민연금은 현재 결정권을 의결권위에 넘길지, 아니면 직접 이를 행사할지 여부를 논의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직전 벌어진 SK와 SK C&C의 합병 사례를 볼 때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합병 역시 의결권위에 찬·반표 결정권을 넘길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의결권위로 공이 넘어가게 된다면 반대표를 행사할 가능성도 보다 높아진다. 이번에도 역시 투자 수익을 근간으로 해야 하는 국민연금의 기본 정신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표가 행사될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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