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경영권 방어'도 연기금의 의무다 [국민연금의 선택은]①경영권 방어장치 입법 등 미비, "외국자본 적대적 경영간섭 막아야"
문병선 기자공개 2015-07-10 11:01:00
이 기사는 2015년 07월 10일 07:3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기금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전면적 의결권 허용을 담은 기금관리기본법이 공포됐던 시기는 2005년 1월27일이다. 그 이전엔 제한적으로만 허용됐다. 지금이야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일상화 돼 별다른 거부감이 없지만 당시만해도 위원회 등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공익성을 띤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사적 기업의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하는지에 대해 찬반이 분분했다.하지만 반대론자 조차도 예외적으로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를 인정해 줘야 한다고 주장한 그 예외 사항은 다름아닌 '외국자본의 적대적 경영간섭 상황'이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당론에 맞서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가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한나라당 주요 인사들은 당시 "기업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민연금 주식의 의결권 행사를 원칙적으로 제한하되 외국자본의 적대적 M&A에 대한 경영권 방어와 투자 수익성 제고가 목적인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연기금의 주식 의결권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요즘 삼성물산 및 엘리엇의 극한 경영권 분쟁 사이에서 고민이 많은 국민연금이지만 2004년의 의결권 전면 허용안 입안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돌이켜보고 국민연금의 의결권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이뤄져야 하는지, 의결권 행사의 프로세스는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참고해야한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2004년은 SK와 소버린의 분쟁, 그리고 영국계 연기금 펀드인 헤르메스와 삼성물산의 분쟁 등 외국 투자회사와 국내 기업간 크고 작은 경영권 분쟁이 한창 일었다. 소버린은 SK 주식을 약 14% 이상 매집하며 이사회 장악을 시도했다. 박빙이었던 SK측과 소버린측의 희비를 가르게 한 사건은 바로 '쉐도우보팅(Shadow Voting)' 방식의 의결권 행사만을 하던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SK측을 지지한다고 발표하고 행동주의투자자(Activist)의 면모를 처음으로 보여주면서 부터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당시 "SK 주식 3.6%를 보유하고 있고 국민연금은 3.6%의 지분에 해당하는 만큼의 의결권을 행사할 것"이라며 "기업지배 구조문제는 당장 결론을 내는 것보다 2~3년 연구해서 결정해야 할 문제이며 기업의욕을 꺾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민연금은 SK 주총이 열리기 직전 공개적으로 "SK를 지지한다"고 천명하기도 했다.
국민연금 등 국내 기관투자가의 지지를 등에 업고 SK측은 소버린과 맞붙은 주주총회에서 기존 예상과 달리 압도적인 표 차이로 SK측 이사 선임 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후 SK 주가가 급등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남긴 것은 부수 수익이다.
기금관리기본법 수정안 입안 당시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를 적극 지지했던 열린우리당 관계자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외국자본의 적대적 위협에 국민연금이 나서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는 당시나 지금이나 외국의 적대적 자본의 경영권 간섭 위협에 노출한 국내 기업 입장에서 보면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2004년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기 전인 2004년 11월22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삼성전자 등 국내 주요기업이 M&A 위험에 직면할 경우 국민연금을 통해 경영권 방어에 적극 나서겠다"고 했다. 집권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이후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와 관련, 이를 원칙적으로 허용하되 적대적 M&A 우려 등 특별한 경우에 한해 경영권 방어에 활용한다는 입장을 정리하기도 했다.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안을 밀어주쳐 비록 수정안이지만 가결하는데 일조했던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상임위원회(국회운영위원회)에 출석해 "외국인들이 국내 기업에 대해서 어떤 그 개입 가능성이 있는데 대한 선의의 견제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된다"며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물론 국민연금의 지나친 개입을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과거나 지금이나 없는 게 아니다. 특히 '연기금 사회주의'로의 이전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연기금 사회주의란 연기금의 주식투자가 많아지고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할수록 기업의 정부화가 진행된다는 용어다.
2005년 1월1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연기금의 주식투자 금지 조항 삭제 및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 전면 허용 안을 담은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안 및 수정안의 반대토론에 나선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당시 한나라당 의원)는 "지금 헤지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SK의 경우 국민연금이 보유한 3% 내외의 주식에 대해 국민연금 측에 백기사 역할을 기대하면서 정부 여당의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에 찬성하고 있다"며 "이는 역설적으로 장차 기업들이 국민연금의 눈치를 얼마나 볼 것인지를 웅변해 주는 사례"라고 했다. 이어 "국민연금이 보유한 주식의 의결권 행사를 통해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임원을 갈아치우거나 일부 시민단체의 재벌개혁 요구를 무분별하게 수용해서 사외이사 등 경영진 선임에 간섭하면서 국가 권력이 원하는 대로 기업 지배구조를 재단하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국내 모경제연구소 관계자도 "국민연금의 기본적 스탠스는 쉐도우보팅을 해야하는 것"이라며 "국민연금은 기업에 롱텀 서포터가 되어야하고 그래야 국민연금의 중장기적 수익성을 끌어 올릴 수 있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주주행동주의 행보를 보이게 되면 연기금 사회주의로 한발 씩 더 나아가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국민연금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간 합병안 주총에서 기권을 해야 맞다. 하지만 기권은 곧 '합병반대'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국민연금의 고민은 깊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의 경영권 보호 장치가 전혀 갖춰지지 못한 상황에서 제도 보완이 이뤄질 때까지는 연기금이 경영권 보호 장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는 데 입을 모은다.
국민연금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2004년의 상황은 경영권 보호장치 입안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연기금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는 기류가 만들어진 것"이라며 "국회에서 현재 상법 개정안이 발의가 됐고 이번일(삼성물산 및 엘리엇 공방)을 계기로 방어수단이 도입되어야 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연기금이 나서서 적대적 세력을 견제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국내 모 연구기관 관계자는 "우리나라엔 재벌에 대한 반감이 만연해 있어 경영권 보호 장치가 제대로 안 돼 있다"며 "소액주주 권리 보호 장치는 강화되고 있으나 기업의 경영권 보호 장치는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엘리엇 사태는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만큼 장치가 마련되기 전까지는 연기금이 나서서 우리 기업을 보호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 관계자는 "엘리엇이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합병에 반대한다고 보고 있지 않다"며 "지금까지 헤지펀드의 사례를 보면 대부분 '먹튀'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주주 입장에서 과연 무엇이 기업을 지속가능하게 할 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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