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60년 히스토리]‘최고령’ 터줏대감, DL이앤씨의 변신⑩유화 떼어내고 건설사업부 독립…'빅3' 자존심 회복 관건
고진영 기자공개 2021-10-14 07:43:46
[편집자주]
건설업계에선 해마다 시공능력을 줄세우는 성적표가 매겨진다. 항목별 점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업계의 '파워 시프트(Power Shift)'를 짐작해볼 수 있는 연례 이벤트와 다름없다. 특히 대형사들에게는 상징성 싸움이자 자존심 문제로도 의미가 있다. 도입 60년, 시공능력평가를 통해 시장의 판도 변천사를 되짚어봤다.
이 기사는 2021년 10월 08일 16:3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국내 가장 오래된 건설사’ 타이틀은 DL이앤씨(옛 대림산업)가 쥐고 있다. 현대건설과 함께 10대 건설사에서 한 번도 밀려난 적이 없는 업계 단 2곳뿐인 ‘성골’ 터줏대감이다.시평 추이 역시 전통의 강호답다. 도입 초기 굳건했던 2인자 위치를 80년대에 잃긴 했으나 5위권 밖으로 내려간 적은 한 손에 꼽는다. 2018년부터 수십년 만에 '빅3' 위치를 탈환하기도 했다. 다만 올해는 기업 분할을 단행하면서 랭킹이 역대 최저 위치로 떨어졌는데 급락한 순위가 제자리를 찾을 지가 관전 포인트다.
◇목재상에서 국내 '최고(最古)' 건설사로
DL이앤씨는 1939년 목재상으로 출발했다. 고(故) 이재준 창업주가 인천 부평구의 한 초가를 매입해 문을 연 ‘부림상회’가 그 모태다. 목재업을 하던 부림상회는 1947년 대림산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업종도 건설로 전환했다. 삼림(森林)이 북한에 집중됐다 보니 목재업이 한계에 부닥친 데다 건설자재를 납품하면서 직접 건설업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다.
이후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을 복구하고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동참하면서 사세를 순조롭게 키웠다. 1962년 발표된 첫 시평순위(당시 도급한도액)에서 DL이앤씨는 현대건설의 뒤를 바로 잇는 2위를 기록했다.
해외건설 ‘외화획득 1호’ 기업이기도 하다. 1966년 1월 미국 해군시설처(OICC)에서 발주한 베트남 항만 공사를 수주하면서 착수금 4만5000달러를 한국은행에 송금했다. 수주 자체는 현대건설이 1개월 정도 앞섰지만 선수금을 받은 것은 DL이앤씨가 한 발 빨랐다.
1975년 1월에는 국내업체 최초로 쿠웨이트에 진출, 5월에는 이란 시장을 뚫었다. 같은 해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정유공장 공사를 수주해 아프리카 시장에도 진출하는 등 해외무대를 향해 공격적으로 발을 넓혔다.
국내 안팎에서 활발히 사업을 펼치면서 1980년대 초까지 시평 랭킹 2위를 지켰으나 후발주자들의 추격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대우건설의 득세 탓에 DL이앤씨는 80년대 중반 3위로 하락, 90년대 들어서는 삼성물산과 동아건설산업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5위까지 떨어졌다. 업계 양강에서 밀려나 자존심을 구긴 셈이다. 이후 꽤 오랫 동안 3위 안쪽을 넘보지 못했다.
◇해외사업 '새옹지마(塞翁之馬)'의 파고
5위권을 유지하던 DL이앤씨는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업계에서 가장 강력한 수준의 구조조정을 펼쳤다. 1999년 말 NCC(나프타 분해 설비)부문을 떼어내 한화석유화학의 NCC부문과 통합, 여천석유화학을 설립하는 등 석유화학부문을 과감히 개편했다. 석유화학비중을 크게 줄이고 건설비중을 높인 셈이다.
당시 다른 그룹들의 구조조정이 대부분 정부 입김 아래 진행된 것과는 달리 한화석유화학과 DL이앤씨의 빅딜은 자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듬해인 2000년에는 아파트 브랜드 ‘e편한세상’을 론칭하고 용인시 보정동에 최초로 적용하면서 주택사업을 본격 확대하기 시작했다. 순위는 큰 등락없이 5위 수준에서 유지됐다.
사업전략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찾아오면서부터다. 위기를 겪으면서 '현금 축적이 최고'라는 기조로 돌아선 DL이앤씨는 자금이용의 효율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용지매입 등의 투자를 줄이고 해외사업 수주를 집중적으로 확대한 이유다.
이에 따라 DL이앤씨는 2010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만 총 22억달러 규모, 5개 건설 프로젝트를 따내고 이밖에도 이란과 쿠웨이트, 중국, 필리핀 등지에서 12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해외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실제 수년간 2조~3조원대로 정체됐던 해외수주 규모는 2011년 6조원까지 급증했다. 사우디 시장이 초호황 국면에 돌입한 것 역시 한몫 거들었다.
덕분에 2006년 이후 줄곧 5~6위에 머물던 시평 순위는 2013년 4위로 전년 대비 두 계단이 뛰었다. 이듬해 역시 순위 유지가 이어졌다. 이 시기 새로운 프리미엄 주택 브랜드 ‘아크로(ACRO)’를 론칭해 반포 ‘아크로 리버 파크’에 적용하기도 했다. 지금도 강남권 최고가로 손꼽히는 아파트다.
그런데 외형 확대에 기여한 해외 수주 물량은 공교롭게도 다시 실적을 깎아먹는 주범이 됐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현지 인건비가 계속해서 오른 데다 하도급업체 생산성이 저하되면서 공기가 지연돼고 추가 비용이 생겼기 떄문이다. 사우디 정부의 자국민 의무고용 강화 정책 역시 건설 환경이 크게 악화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발(發) 악재로 DL이앤씨는 2014년 발생한 영업손실만 2700억원에 이르렀다. 2015년 시평 순위도 6위에 그치면서 5위권 수성에 실패했다.
애물단지였던 사우디아라비아 사업은 2016년에 와서야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같은 해 시평 순위가 5위로 반등한 이후 연이은 순위 상승을 계속해 2018년에는 3위에 올라섰다. 부진한 해외사업을 주택사업이 만회한 덕이었다. 2018년 상반기에만 정비사업 수주실적 1조원을 돌파, 전년 전체 정비사업 수주액 7866억원 규모를 이미 상반기에 넘어섰다.
◇분할 여파에 '숨고르기'…디벨로퍼로 새출발
DL이앤씨는 같은 순위를 2020년까지 유지하며 ‘빅3’ 입지를 굳히는 듯 했으나 올해 다시 판세가 요동쳤다. 랭킹이 8위로 5계단이나 급감했는데 시평 제도가 도입된 이래 5대 건설사에서 밀려난 것은 처음이다.
이는 중간지주사 전환에 따른 여파다. 기업 분할에 따라 그간 건설과 유화 양축으로 이뤄졌던 사업구조에서 유화를 떼어내는 변신이 있었다. 때문에 신설법인 기준이 적용되면서 DL이앤씨는 경영평점이 1점에 그쳤다. 2020년 전체 건설사 중 4위였던 경영평가액도 17위로 낮아졌고 전체 순위 역시 뚝 떨어졌다.
앞서 DL이앤씨는 올해 1월 기존의 '대림산업'을 지주회사와 2개의 사업회사로 분할하고 건설사업부를 DL이앤씨, 석유화학사업부를 DL케미칼로 떼어내면서 중간지주사 체제를 완성했다. 사업적, 재무적인 독립성을 노렸다는 설명이다.
분할을 계기로 사업 전략도 전환기를 맞았다. DL이앤씨는 '글로벌 디벨로퍼'를 목표해 데이터를 중심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사업화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관건은 실탄 확보인데 주택사업이 캐시카우 역할을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분할 이후에도 재무건전성은 여전하기 때문에 시평 순위는 곧 회복할 것으로 본다"며 "다만 디벨로퍼 역량을 높이기 위한 유동성을 충분히 확보하려면 재건축·재개발 등 도시정비사업에서 수주를 늘리는 것이 핵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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