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bell

전체기사

국내 중소 팹리스 육성의 출발점은 '수요자 연계' [첨단전략산업 리포트]대기업 수요자와 연결한 정부 대형국책과제 지원에서 시작해야

김혜란 기자공개 2022-04-14 13:45:12

[편집자주]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는 한국을 먹여 살리는 3대 국가대표 산업이다. 정부도 중요성을 인식해 '국가 첨단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육성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비메모리를 키워야 하는 반도체, 중국의 추격을 받는 디스플레이, 개화하는 시장에서 주도권 선점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배터리 업계, 모두 현실은 녹록지 않다. 더 빠르게 치고 나가지 못하면 세계 무대에서 밀릴 수 있다. 대기업을 필두로 첨단전략산업 생태계를 구성하는 소재·부품·장비업체들이 현재 어디에 서 있는지 진단하고, 미래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를 다각도로 들여다본다.

이 기사는 2022년 04월 12일 10:37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반도체 초강국' 건설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와 파운드리(위탁생산), 소재·장비, 패키징까지 밸류체인 안에 들어가는 각각의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출 때 가능하다. 특히 4차산업이 고도화될수록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등에 탑재되는 시스템 반도체의 중요성도 더 부각된다.

시스템 반도체 기술의 뿌리인 팹리스의 역할과 생태계 내 위상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 반도체 산업에서 팹리스는 유독 취약하다. 토종 팹리스를 다 합쳐도 글로벌 시장점유율이 1% 정도에 불과하다.

정부도 2000년대 중후반부터 중소 팹리스 생태계 강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왔으나 정책의 연속성이나 방향성 면에서 시장의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팹리스 산업이 여전히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정부가 대기업과의 '수요자 연계'를 핵심으로 한 보다 촘촘한 정책적 지원을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팹리스 유망주들의 쇠락, 왜 실패했나

국내 팹리스 역사에서 성장 잠재력을 인정받았던 팹리스들의 특징은 한국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세트(완성품)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개발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 기업 상당수가 해외 시장을 뚫지 못해 결국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엠텍비전과 코아로직 같은 토종 기업들이 국내 대표적인 팹리스로 주목받았다. 이들 기업은 삼성전자와 LG전자라는 글로벌 세트 업체를 고객사로 확보한 덕에 급성장할 수 있었다. 엠텍비전과 코아로직은 피처폰(통화, 문자메시지 등만 되는 휴대전화)에서 카메라 기능을 구현하는 카메라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CAP) 칩을 만드는 업체였다.

둘 다 전성기 때 매출 2000억원을 넘으며 '스타 팹리스' 유망주로 평가받았으나 지금 남아 있는 중소 팹리스 중 매출이 1000억원을 넘고 흑자를 내는 기업은 텔레칩스, 에이디테크놀로지, 어보브반도체, 제주반도체 외에는 찾기가 어렵다.

대기업 팹리스도 마찬가지로 그룹 내 수요처를 확보한 덕에 생존이 가능했다. 삼성전자 시스템LSI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CMOS 이미지센서(CMOS Image Sensor) 등의 대규모 수요처인 세트 사업부가 있었다. LX세미콘도 지금은 분리됐으나 과거 LG그룹 안에서 가전과 디스플레이 부문에 디스플레이 구동칩(DDI) 등을 공급하며 성장 기반을 다졌다.

글로벌 시장조시기관 IC인사이츠에 따르면 한국의 작년 팹리스 매출은 전 세계 중 1%에 불과하다. 이는 중국(9%)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준다(자료=IC인사이츠)

그러나 국내 팹리스가 싹을 틔우던 초반, 정부가 산업을 키우는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중소 팹리스들이 각자도생으로 버티다 보니 어느 순간 성장의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국내 완성차 기업은 반도체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는 산업 간 유기적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을 방증한다.

반면 세계 1위 미디어텍 외에도 노바텍, 리얼텍, 하이맥스 등 경쟁력 있는 팹리스를 배출한 대만은 달랐다. 대만은 세계적인 전자 대기업이 없어 초기부터 중소기업 위주로 시장이 형성됐고, 처음부터 중국 등 해외 시장을 타깃으로 했다. 중소 팹리스들이 각각 전문 분야에 집중하며 촘촘하게 생태계를 만들어갔다. 무엇보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뒷받침됐다.

◇중소팹리스 성장 키워드 '수요자 연계' '대형국책과제' '연속성'

반대로 국내에는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완성품 대기업들이 많다. 이런 산업구조에선 역으로 중소 팹리스가 대기업과 함께 일하며 쌓은 경험을 발판으로 해외로 나갈 수 있게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반도체는 부품이기 때문에 반도체가 필요한 산업과 연계해 공동개발에 협력하는 체제가 구축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토양 위에서 중소 팹리스들이 성장 기반을 다질 수 있다. 단순히 삼성전자나 LG전자뿐 아니라 자동차, 바이오, 로봇 등 반도체와 깊은 연관이 있는 사업 분야와도 협력할 수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중소 팹리스가 국내 전자제품, 자동차 기업 등 수요자와 연계되고, 팹리스가 반도체를 공급하면 실제로 제품에 장착돼야 하고 이런 시스템이 운영돼야 하는데 그동안 국내에선 잘 안 됐던 부분"이라며 "전자, 자동차 산업도 팹리스와 긴밀하게 협력해 세계 최초의 반도체 제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기업이 고객사로 수요를 끌어주지 않으면 제2의 퀄컴, 미디어텍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대기업 수요자와 중소 팹리스를 연계한 대형 국책과제를 만들고 연구·개발(R&D)등을 지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정부의 팹리스 지원책은 예산을 쪼개 한계기업을 포함해 여러 곳에 배분하는 식으로 이뤄졌는데, 업계에선 대기업과 소프트웨어를 공동개발할 역량 있는 팹리스에 '선택과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팹리스 업계 한 관계자는 "대기업 입장에선 국내 팹리스와 협력해 칩을 개발해 사용하면 원가를 절감할 수 있지만, 검증 안 된 칩을 사용하기는 어렵다"며 "정부가 대기업에 확실한 당근책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은 해외 기업에 의존하더라도 국내 중소 팹리스 중 실력과 잠재력이 있는 기업들을 발굴해 대기업의 '플랜B'로 클 기회는 열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업계에 가장 필요한 실효성 있는 지원을 우선적으로 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팹리스 업계의 큰 고민 중 하나는 초기 개발비(NRE)다. NRE는 양산 전 파운드리에서 샘플 물량을 뽑을 때 드는 비용인데 여기에 수십억에서 수백억원이 필요하다. 초미세공정으로 들어갈수록 개발비는 더 비싸진다. 대만과 중국 등에선 정부 차원에서 팹리스 업계의 NRE 상당을 지원해주는 경우가 많다.

가장 중요한 건 정부 정책이 시류에 좇는 게 아닌 장기적인 안목으로 설계된 '십년지대계'여야 한단 점이다. 앞선 관계자는 "2010년 초반부터 2018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관련 정부 대형과제 지원 사업은 확 줄고 '핫'한 바이오나 로봇 등에 몰리는 바람에 최소 5~6년간은 국책과제가 없었다"며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2019년부터 일본의 수출 규제 이슈, 미국의 공급망 재편 움직임, 중국의 반도체 굴기 등 이슈가 터지며 전략자산으로서의 반도체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고서야 대형과제 지원 사업이 다시 활성화됐다. 무엇보다 정책을 연속성 있게 추진하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더벨 서비스 문의

02-724-4102

유료 서비스 안내
주)더벨 주소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영풍빌딩 5층, 6층대표/발행인성화용 편집인이진우 등록번호서울아00483
등록년월일2007.12.27 / 제호 : 더벨(thebell) 발행년월일2007.12.30청소년보호관리책임자김용관
문의TEL : 02-724-4100 / FAX : 02-724-4109서비스 문의 및 PC 초기화TEL : 02-724-4102기술 및 장애문의TEL : 02-724-4159

더벨의 모든 기사(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copyright ⓒ thebell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