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3년 08월 09일 07:4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이 물러나기로 했다. 9년의 임기를 마치고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온다.금융지주와 은행 CEO의 말로는 대부분 잡음이 있었다. 금융당국에서 경고를 하고 내려가라는 종용이 있은 뒤에야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버틴 CEO들에겐 값비싼 대가가 돌아 왔다. 검찰 조사가 시작되고 금감원이 징계를 했다. 은행은 만신창이가 되고 각종 소송까지 겪은 뒤 물러났다. CEO들간 갈등이 생겨 서로 상채기를 내고 고소고발을 한 뒤 동반 퇴진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있었다.
윤 회장은 깔끔하게 물러났다. 회장추천위원회가 가동되고 롱리스트를 꾸리자 용퇴를 결심했다. 숏리스트가 발표되기 전 먼저 하차를 선언했다. 후배들에게, 회추위 위원들에게 부담을 최소화했다.
윤 회장과 대화를 해보면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특정 주제를 물어보면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해 딱 요약을 한다. 군더더기가 없다. 첫째, 둘째, 셋째라고 짚으며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정돈해 말한다.
은행의 약탈적 이익에 대해 묻자 글로벌 경쟁력과 주주환원 이슈 등을 짚어 한국 금융의 경쟁 구도는 건강하다고 평가했다. 다만 임직원 보수가 과도하다는 지적은 자성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은 용병술이다. 증권 부문 성장의 비결을 묻자 "은행과 호흡이 다르다"는 말로 답을 했다. 윤 회장은 KB증권에 CEO를 여럿 뒀다. 증권의 전문성을 인정해줬다. IB, WM, 리테일 등 분야마다 전문가들에게 힘을 실어줬고 전담을 시켰다.
금융지주가 인수한 뒤 증권사 CEO로 은행원들을 보내 실패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은행원들이야 한두해 경험하고 끝이다. 증권업이란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윤 회장은 이를 인정해주고 전문가들이 책임을 지도록 했다.
금융지주 산하의 증권사 중 KB증권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시장 점유율을 늘린 곳을 찾기 힘들다. KB증권은 최근 IB, M&A, DCM, ECM 등 자본시장 리그테이블 4관왕을 석권했다.
윤 회장 임기 동안 성사시킨 수많은 M&A와 성장 스토리도 이미 잘 알려진 얘기다. 현대증권을 인수해 오늘의 KB증권으로 키웠고 푸르덴셜생명을 인수해 KB라이프가 됐다. KB금융은 비은행사업을 강화해 조화로운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윤 회장 임기 동안 여러 재미있는 이벤트도 있었다. KB금융은 최근 리브엠이란 브랜드의 알뜰폰 사업에 대해 금융당국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금융과 통신의 결합은 '데이터'가 중요해지는 요즘 시대에 막대한 파워를 갖는다. 단순한 알뜰폰 이상의 역할을 하는 비즈니스다. 5년여간 공들여 키운 비즈니스다.
KB금융의 소프트파워도 눈길이 간다. 윤 회장 집무실에서 내려다 보이는 KB국민은행 옥상엔 꿀벌을 키우는 양봉장이 있다. 'K-Bee'라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ESG경영의 일환으로 시작했다. 여의도 도심 한 복판에서 키우는 벌들은 여의도 일대와 영등포까지 오간다. 꿀벌 생태계도 복원하고 여기서 채취한 꿀을 지역민들과 나눈다. 은행에서 내놓은 ESG 아이디어 중 사뭇 참신하다.
윤 회장이 또 하나 남긴 것은 승계 프로그램이다. KB금융의 승계 프로그램은 잘 준비된 매뉴얼 같다. 변수가 많지 않고 예측 가능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과 방식까지 공개돼 있다. 이대로라면 큰 잡음없이 완주될 듯하다. 이미 시작부터 윤 회장의 용퇴로 깔끔해졌다.
아쉬운 대목은 윤 회장의 아이디어가 아직 덜 발현된 게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혁신은 젊음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경륜을 가진 '올드보이'들이 의외의 혁신과 참신함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윤 회장이 그간 보여준 용병술과 이벤트들이라면 뭔가 더 남아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기간 근무하며 연임한 CEO라고 무조건 퇴진하는 게 정답은 아닐 텐데, 금융당국의 획일적인 잣대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윤 회장에게 술 한잔 청하며 못 다 꺼낸 얘기들을 좀 더 기록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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