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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시멘트의 퇴장, 역지사지

한형주 기자공개 2016-07-11 09:11:41

이 기사는 2016년 07월 06일 08시36분 thebell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일본 태평양시멘트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쌍용양회의 대규모 유상증자를 무기로 내세운 사모투자회사 한앤컴퍼니의 전략이 주효했다. 4000억 원에 육박하는 증자를 '주주 배정'으로 단행한다고 선언했다. 쌍용양회에 대한 지분율은 한앤컴퍼니가 46.14%, 태평양시멘트가 32.36%다. 나머지 20% 남짓은 다수의 소액주주들이 쥐고 있어 개개인이 거래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즉 이번 증자는 한앤코가 태평양시멘트를 코너로 몰기 위한, 준비된 한 방이었다.

태평양시멘트 입장에선 손놓고 가만히 있으면 지분율만 깎일 게 뻔했다. 이를 보전하려면 청약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자금 부담이 만만찮았다. 한앤컴퍼니는 유증 신주 발행가 할인율을 유례없이 낮은 수준(10%)으로 책정했다. 기존 주주가 쌍용양회 주식을 비싸게 인수토록 유도한 셈. 자금력을 의심받는 태평양시멘트의 아킬레스건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다. 한앤코가 유증 카드를 재차 들이밀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때 쫓아다녀야 하는 것도 골치아픈 일이었다.

태평양시멘트는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국내에서 우호 투자자를 물색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PE업계에서 엑시트(투자금 회수) 보장을 강하게 요구해 이 또한 성과를 보지 못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유증 공시가 난지 두 달 만에 백기 투항한 것이 현재까지 스토리다.

태평양시멘트는 보유지분(32.36%) 전량을 4500억 원에 한앤코에 넘기기로 했다. 주당 매각가는 1만 7500원. 주식매매계약(SPA) 체결 당일 종가(1만 7550원)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과거 이 지분을 매집하는 데만 6650억 원을 썼다. 엄청난 투자 손실을 안고 등 떠밀려 나가는 것이다. 억울한 마음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보지만 부질없어 보인다. 태평양시멘트로서는 전략의 실패, 아니 전략의 부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15년. 태평양시멘트가 쌍용양회 경영권을 행사한 기간이다. '한앤컴퍼니의 기막힌 끝내기'로만 평가하고 넘어가기엔 사연이 많은 세월이었다. 태평양시멘트의 쌍용양회 지분 투자는 2000년도 김대중 정부의 '세일즈 외교'가 빚어낸 산물이다. 유동성 위기에 처한 국내 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외자 유치가 각광받던 시절. 당시 쌍용양회는 현대건설, 동아건설과 함께 부실기업 '빅3'로 꼽힐 정도로 재무상태가 취약했다. 다시 말해 먼저 SOS를 친 쪽은 우리였다.

태평양시멘트는 산업은행 등 채권단의 요청에 따라 2000년 하반기 쌍용양회에 3650억 원을 투자하고 29% 지분을 취득한다. 우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딜 클로징 직후 채권단이 태평양시멘트의 투자금 대부분을 채무 변제에 활용하면서 신뢰가 훼손됐다. 이를 놓고 일본의 한 경제지는 '태평양시멘트의 악몽'이란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얼마 안있어 채권단은 태평양시멘트에게 쌍용양회 정상화를 위한 추가 지원(3000억 원)을 요구한다. 그 대가로 쌍용양회의 경영권을 보장해주게 된 것이다.

어차피 유명무실해질 경영권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투자로 30%대의 쌍용양회 지분을 손에 넣긴 했으나, 그래봐야 태평양시멘트는 2대주주였다. 사실상 최대주주인 채권단 지분이 제3자에 넘어갈 경우 경영권 분쟁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이는 실제로 태평양시멘트와 채권단이 작년 하반기부터 한앤컴퍼니를 사이에 두고 송사를 치른 계기가 됐다. 결과적으로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시멘트 회사 간 지분 관계는 별로 아름답지 않게 청산됐다.

태평양시멘트를 두둔하자는 게 아니다. 단지 아쉬울 때 손 내밀었다가, 필요 없어지고 되레 껄끄러워지면 매정하게 돌변하는 주체가 늘 우리일 수만은 없다는 걸 직시하자는 것이다. 태평양시멘트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국내 기업도 "저 나라의 산업은행은 산업을 망치는 은행"이라고 평가절하하고, 현지 법원에 승산없는 소송을 제기하고, "명분", "의리" 운운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황이 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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