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1년 10월 15일 07:4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삼성 오너가(家) 주식이 시장에 나온다.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은 삼성 주요 계열사 주식을 매각하기로 했다. 홍 전 관장은 삼성전자 주식을 무려 1조4200억원 어치를 매각한다. 이부진, 이서현 두 자매는 삼성SDS, 삼성생명 주식을 일부 매각한다. 내놓은 주식을 모두 더하면 2조1500억원 규모다.고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에 대한 상속세 납부용이다. 삼성 오너들이 내야 하는 상속세는 약 12조원, 5년 동안 6차례에 걸쳐 분납할 예정이다.
지난 4월 1차분 2조원을 냈는데 당시엔 대출을 활용했다. 내년부터 5차례에 걸쳐 매년 2조원의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대출을 활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다른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도 마땅치 않다. 결국 지분 매각이란 정공법을 선택했다.
오너들에게 주력 계열사 주식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다. 얽히고설킨 대기업 집단의 지배구조를 유지하려면 주력 계열사 '주식'은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옛 재벌 오너들은 지분을 지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다. 회사를 쪼개고 합치면서 지분율을 끌어 올렸다. CB를 발행하고 BW를 발행하기도 했다. 특별 배당을 해 상속세를 낼 재원을 마련하고 회사로부터 대여금을 받기도 했다. 오너 개인회사 가치를 껑충 뛰게 해 오너의 재산을 만들기도 했다.
이도 저도 안되면 오너들끼리 품앗이를 했다. A오너가 보유한 지분을 B회사가 사주고 B오너 지분은 A회사가 사주는 식이다. 이너서클 속에 지분을 두면 우호지분으로 묶어 둘 수 있다. 상호 보유이니 문제가 될 여지도 적다. 시간을 갖고 되찾아오면 된다. 지배구조 유지를 위한 묘수들이었다.
삼성가 오너들이 이번에 선택한 방식은 기존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말그대로 정공법, 지분 매각을 선택했다. 그것도 시장 매각 방식이다.
삼성 오너들은 KB국민은행과 신탁 계약을 맺고 보유 지분을 팔 예정이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공정 가격으로 주식을 처분한다. 이 주식을 다른 재벌들이 받아갈 가능성도 있겠으나 어차피 시장 가격이다. 편의나 특혜가 개입하긴 힘들다. 삼성 정도의 인맥과 파워라면 좀 더 유리한 조건으로, 혹은 나중에 되사오는 파킹 거래라도 시도할 수 있을텐데 이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
물납 방식도 택하지 않았다. 2003년 교보생명 신용호 창업자가 작고한 뒤 신창재 회장은 상속세 납부를 위해 지분 5.85%를 정부에 물납했다. 당시 줄어든 지분 탓에 신 회장은 잠재적 경영권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삼성도 물납을 선택할 수 있었다. 수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이건희 컬렉션 미술작품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일각에서 특혜론이 제기되자 삼성은 일찌감치 미술품을 사회에 기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래저래 퇴로를 두지 않았다.
삼성의 지분 매각은 한번으로 끝나기 힘들다. 앞으로 4차례는 더 삼성 지분이 시장에 나온다. 당장이야 삼성의 지배력이 흔들리지 않겠지만 앞으로 4년 뒤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삼성은 이같은 위험을 감내하고 정공법을 택했다.
삼성의 지분 매각은 우리 사회에 기업의 영속적인 지배구조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정공법으로 상속 이슈에 대응할 수록 대기업 오너십은 점차 해체될 수 밖에 없다. 삼성 뿐 아니라 대부분 대기업, 중견 기업도 마찬가지다.
오너 체제가 해체되어도 한국 대기업들은 여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까. 오너 체제를 대신할 새로운 지배구조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가능할까. 극단적으로 삼성 오너가 내놓은 지분을 외국계 펀드가 인수한다면 어떻게 될까. 국민연금이 삼성의 1대주주가 돼 경영에 적극 개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삼성 오너가 지분 매각이 갖는 의미이자 한국 정재계에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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