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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 파킹 제동]반쪽짜리 채권시가평가제…수법만 더 교묘해졌다②증권사 위법, 합법으로 둔갑…금감원 허술한 조사도 도마위

윤기쁨 기자공개 2023-06-14 08:24:31

[편집자주]

KB증권과 하나증권간 채권 거래에서 촉발된 이른바 '돌려막기' 이슈가 업계 전반으로 다시 번지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오랜 기간 지속된 관행이라고 항변하고 있지만 당국은 증권사별로 순차 검사를 진행하는 등 불법성 여부를 따져묻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들은 불건전 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움직임에 찬성하면서도 자칫 시장 위축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더벨은 뿌리 깊게 박힌 과거 채권 거래 관행들과 향후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짚어본다.

이 기사는 2023년 06월 12일 10:2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악습을 끊을 수 있는 기회는 수차례 있었다. 2013년, 2017년만해도 불법 자전거래가 적발된 증권사들이 무더기로 제재를 받았다. 금융감독원은 매년 불건전 영업행위를 엄단한다며 으름장을 놓지만 그뿐이었다. 오히려 수법은 날이 갈수록 교묘해졌고, 증권사간 연대는 단단해졌다.

지난해는 대내외 변수가 유독 많았던 시장이다. 강원도 레고랜드 채무불이행 여파로 채권 시장은 급속도로 경색됐다. 직후 발생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은 위기감을 더 키웠다. 단기성 상품인 요구불예금(입출금이 자유로운 예금)을 미국 장기채에 투자한 것이 원인이 됐다. 오래된 관행으로 국내 증권가에서는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잡은 '만기 미스매칭' 전략과 매우 흡사하다.

금융 조사 당국도 이에 대한 우려의 뜻을 밝히며 작년 하반기부터 채권시장 모니터링에 나섰다. 연계 자전거래와 파킹, 만기 미스매칭 전략 등 불건전 영업행위를 집중 조사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권사들은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당당했다. 제도적으로도 빠져나갈 구멍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채권시가평가제 실효성 다시 수면위로…무용지물된 규정

국내에는 2000년 7월 '채권시가평가제'가 도입됐다. 채권값을 장부가(최초 매입가)로 계산하지 않고 시중 금리(시가)로 평가하는 제도다. 회사채·CP(기업어음) 등을 상장 주식처럼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으로 매일 산정한다. 장부가와 시가의 지나친 괴리로 시장이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문제는 해당 제도 적용 대상이 ‘펀드’에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가령 자산운용사들이 내놓는 채권형 펀드는 편입 채권을 시장가로 매일 환산, 기준가에 반영해 공시해야 한다. 이에 상품 가입 당시 고객에게 목표수익률을 약속할 수 없다. 환매시 가입할 당시보다 금리가 낮아지면 채권값이 올라 수익률이 높아지지만, 반대의 경우 하락하기 때문이다.

한편 고객자산을 일임해 운영한다는 점에서 펀드와 성격이 똑같은 랩어카운트(Wrap)·신탁 상품은 빠졌다. 대다수 증권사들은 모호한 제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편입 채권 자산을 장부가로 평가해 운용해 왔다. 장부가는 가입 초기 상품 만기까지 발생하는 이자만을 기준가에 반영한다. 고객 입장에서는 원금을 보장받는 매력적인 상품이다.

이러한 반쪽짜리 규정은 증권사들의 위법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됐다. 시중 금리보다 높은 수익률을 내세우며 자금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금리를 매번 반영하지 않아도 돼 자전거래·파킹을 활용한 만기 미스매칭 전략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다. 랩·신탁 시장은 이 점을 이용해 단기간 급속도로 성장했다.

코로나 이전 금리하락기까지 평화롭게 운영됐지만 기준금리가 급격히 인상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채권 시가평가액이 쪼그라들면서 실제 CP, 장기채 등에 투자한 랩·신탁 상품 수익률이 급락했다. 일부 증권사가 평가손실을 감추기 위해 타 증권사에 파킹해둔 채권을 장부가로 다시 사들이는 과정이 포착, 자전거래 의혹이 처음 제기됐다.

문제는 이같은 상황이 랩·신탁 상품에서 채권을 장부가로 운용하고 있는 증권사 대부분에서 벌어졌을 것이란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감독원이 명확한 위법 여부를 가리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장부가 평가는 규정상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전거래·파킹 거래임을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 논란이 된 증권사도 "손실을 덮을 목적으로 거래한 것이 아니다", "일부 수익자들이 유동성 공급을 요청해 타 증권사와 채권을 거래했다"며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금감원, 의미없는 경고만 수차례…허술한 조사에 교묘해지는 수법

뿌리깊이 박힌 채권 거래 관행은 사실 십여년 전부터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2015년 현대증권(현 KB증권) 고객자산운용본부장, 신탁부장 등 임직원들은 자전거래·파킹 유형 혐의로 벌금형 등을 선고받았다. 우정사업본부와 노용노동부 등 연기금 등을 대상으로 상품 만기보다 긴 CP를 사들이며 만기 미스매칭 전략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금융감독원은 해당 사건을 계기로 10여개 증권사의 준법감시인과 감사 부서 임직원들을 소집해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채권형 랩·신탁 상품에서 CP 파킹을 통한 연계 자전거래가 발각되면 강력한 처벌을 내릴 것이라며 주의를 주기도 했다.

유사한 시기 신한투자증권, 미래에셋증권, 한화투자증권, 교보증권 등에 대해서도 불건전 영업행위와 관련해 징계를 내렸다. 특히 신한투자증권의 경우 2011년, 2012년, 2017년 세차례에 걸쳐 불법 자전거래 혐의로 과태료와 임원 견책 등의 제재를 받았다.

하지만 시장은 자정되기 보다는 한층 더 치밀한 방식을 사용했다. 연계 자전거래와 파킹을 한 달에 걸쳐 한다던가, 여러 증권사에 나눠 파킹하는 식으로 금융 조사 당국이 거래 유형과 경로를 파악하기 힘들게 하는 식이다. 애초 규정 자체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장이다보니 당국은 위법을 입증하는데 애를 먹었고, 그러는 동안 관행의 뿌리는 더욱 깊어졌다.

현재 국내 증권사에 대한 전수조사가 진행될 예정인 가운데 이번에도 시장에 경종을 울리는 정도로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부터 제기된다. 보다 촘촘한 제도 개선과 면밀한 조사, 강력한 처벌, 업계의 자성이 동반되지 않는 한 악습인 되물림 될 것이란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CP는 기관 간 거래가 많기 때문에 투명하지 않고 원래도 시장금리랑 괴리가 상당한 편”이라며 “일반 고객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랩·신탁 상품도 펀드처럼 장부가가 아닌 시가평가로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은 옛날부터 제기돼 왔는데, 당국도 이를 고려해 제대로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뿌리가 뽑힐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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