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3년 08월 18일 07시48분 thebell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집안 어른들이 모두 작고하고 지금은 작은아버지댁과 선산 외에 연고가 끊긴 고향. 그곳에선 고랭지 배추가 자랐다. 동이 트기 전 할아버지는 싸리비를 들고 집을 나섰다. 대문부터 언덕배기 너머 신작로까지 약 200미터 거리를 쓰셨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일평생 거르지 않은 비질 소리는 일대를 평정한 수탉 울음만큼 강력한 알람이었다고.아쉽게도 이는 전언일 뿐 할아버지의 비질 소리를 한 번도 직접 듣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기회는 충분했건만. 이팔청춘을 곱절 넘게 지난 요즘이면 가능할까. 육체는 어느덧 할아버지를 닮아 노화의 징조가 만연하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안구건조증도 그 중 하나. 열대야가 주 원인이겠으나 최근엔 진짜 새벽잠도 좀 줄었다.
그러니 기회가 찾아온다면,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한 번만이라도 함께 비를 잡고 그 순간을 추억하고 싶다. 점안액과 분비물로 뿌예진 안경알 너머. 진짜 '으른'의 세계로 향하는 첩경이 이제는 보이는 느낌이다.
물론 지금 기억을 안고 그때로 회귀한다 쳐도 새벽녘 베개에서 머리를 떼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200미터는 산책으론 가벼운 거리. 그러나 비질을 더하면 동네 일대에선 혁신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겠지.
강릉 최씨 난장공파 36대손이 한순간에 동네에서 '엄친아'가 되는 건 두말할 나위 없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댄다는 은근한 힐난도 들어야 할 터. 이쯤에선 육체적 고통은 덤에 지나지 않는다. 할아버지를 기리며 시작한 망상일 뿐인데도 온갖 상념이 머리를 무겁게 한다. 고작 집앞 길을 쓰는데 '혁신'에 비견할 각오가 필요한 건 아닌데 말이다.
최근 혁신의 참뜻을 반추할 계기가 있었다. 점심을 같이 하던 바이오텍 대표가 혁신이 범람하는 지금의 바이오업계 세태를 우려를 나타냈다. 요지는 "도전자가 많은 건 좋은데, 모두가 혁신, 혁신하며 껍데기를 벗긴다는 말만 하지 새살이 나기까지의 고통과 기다림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였다.
'껍데기를 벗겨 새살을 내게 한다[[革新]'는 섬뜩한 단어는 '언드러거블 노블 타깃 파이프라인'을 번안하는 과정에서 채택돼 이내 통용됐다. 적어도 바이오텍 업계에선 워낙 많이 쓰이다보니 단어의 무게감이 꽤 퇴색된 느낌이 든다.
저마다의 물질을 앞세워 기존 약으로 어려웠던 '노블 타깃(Novel target)' 공략을 천명한 바이오벤처만 적어도 1000개. 그리고 최근 몇 년 새 섹터로 유입된 모험자본은 수 조원을 넘었다.
어쩌면 바이오벤처 업계는 역대 최대 펀딩 호황기를 겪으며 변모를 위한 껍데기를 채 벗기도 전에 축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껍데기를 떼어낸 수많은 바이오벤처들은 비로소 발가벗은 후폭풍을 직면하고 있다.
손거스러미를 잘못 떼도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길고 긴 바이오 투자 혹한기 앞에 선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응원하는 것만으로도 점차 미안한 맘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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