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5년 03월 20일 07시46분 thebell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임원들에게 "삼성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면서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역사에 만약(if)은 없다고들 한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평범하면서도 존엄한 진리에 역사라는 무게감이 더해졌다. 그래도 인간이 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시계를 약 15년 전으로 돌려본다. 삼성그룹은 지난 2010년 5대 신수종 사업으로 △태양전지 △자동차용 전지 △LED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를 선정했다. 현재 글로벌 테크업계 최대 화두인 인공지능(AI)은 리스트에 없다.
AI가 산업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에서 '4차산업혁명'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을 무렵이다. 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3D 프린팅, 모빌리티 등 분야에서 기술 혁신과 융합이 발생하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을 열 것이라는 일종의 예언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두 달 후인 2016년 3월 이세돌과 알파고 간 세기의 대국이 열렸다. 한국은 다른 곳도 아닌 안방에서 인공지능에 맞선 인류의 첫 패배를 목도했다. AI는 더 이상 우리와 동떨어진 별천지 기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삼성그룹이 인공지능을 포함한 4대 미래성장사업 육성안을 새롭게 내놓은 것은 2년여의 시간이 흐른 2018년이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5대 신수종사업을 발표했던 2010년 초 삼성전자가 HBM(고대역폭 메모리)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는 점이다. 반도체는 원래 삼성전자의 주력 사업이기에 신수종 사업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기존 포트폴리오 기술 강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랬던 삼성전자는 약 10년 후인 2019년 HBM팀을 해체했다. AI를 미래성장사업에 포함시킨 이듬해에 내린 결정이다. AI시대가 코 앞으로 성큼 다가왔고 이에 따른 고성능 HBM 수요 폭발을 예견하지 못했다.
비단 삼성전자만의 뼈아픈 실기는 아니다. 미국 경제와 산업을 대표하는 다우존스 지수에서 얼마 전 인텔이 빠지고 엔비디아가 새롭게 편입됐다. 반도체 제국을 일궜던 인텔조차도 AI 시대에 뒤처지며 자존심을 구겼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은 인텔을 대체할만한 딥테크 기업이 즐비하지만 한국은 삼성전자를 대체할 대안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삼성은 한국경제의 대들보이자 최후의 보루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삼성전자 수출 실적 비중은 20%가량을 차지한다. 삼성전자가 납부하는 법인세 비용은 한때 정부 법인세 수입의 20%에 육박했다. 삼성의 위기론에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 때문이다.
그렇다고 삼성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중국을 보자. 얼마 전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딥시크는 2023년 설립된 신생 스타트업이다. 딥시크를 비롯해 ‘게임사이언스’, ‘유니트리’, ‘딥로보틱스’, ‘브레인코, ‘매니코어 테크’ 등 주목받고 있는 항저우 육룡(六龍)은 모두 스타트업이다. 미국에서도 끊임없이 스타 스타트업이 탄생하고 있다.
한국에도 희망은 있다. 2017년 설립된 AI 반도체 팹리스 스타트업인 퓨리오사AI는 현재 메타가 인수를 논의하는 유망 기업으로 성장했다. 퓨리오사AI에 투자한 벤처캐피탈 대표는 딜이 성사된다면 맨발 투혼을 보이며 US 여자 오픈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승한 박세리 선수의 쾌거에 비견될만한 사건이라고 치켜세웠다. 위기의 삼성이란 말이 회자될수록 스타트업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비단 VC업계에서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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