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6년 11월 25일 07:56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검찰의 압수 수색에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흡사 쑥대밭이다. 운용인력들은 손놓은 채 망연자실한 분위기다. 이 와중에 운용 업무에 매진하길 바라면 무리겠다 싶다. 삼성물산 합병 찬성으로 국민연금이 수천억 기금 평가손실을 입었다는데, 이 일로 초래될 운용업무 지장의 피해는 얼마나 클 지 걱정이 더 앞선다.헷갈려서는 안될 게 있다. 사안의 본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간 합병에 대해 '찬성하도록 하는 외압이 실제 있었느냐' 하는 것이지, '왜 합병을 반대하지 않았느냐' 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외압이 실제 있었는지, 외압이 있었다면 그 외압과 찬성간에 인과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십수년동안 현장에서 국민연금 기금운용 조직을 접해 온 기자의 판단으론 외압이 실제 있었다손 쳐도 직접 인과관계가 있었다 믿기 어렵다.
물론 외압이 실제했을 개연성은 있다. 그 압력이 청와대인지, 정치권인지, 삼성그룹인지에 대해 외부인이 알 길이 없지만, 당시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의 주요주주로서 합병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다는 정황 자체가 그 개연성을 상정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삼성물산 뿐이겠는가. 국민연금은 500조 원이나 되는 기금을 굴린다. 삼성 그룹은 물론 현대차, LG 등 국내 굴지 기업들과 금융회사들의 주요주주이기도 하며, 기업 인수합병(M&A), 개발프로젝트, 해외투자 등에서 큰손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는 기관이다. 때문에 국민연금의 향배는 언제나 이해 당사자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며, 국민연금의 내부자들은 늘 로비와 압력의 대상으로 지목된다.
어떤 조직이든 생존을 위해 적응하기 마련이다. 국민연금 기금조직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은 그 수많은 로비와 압력으로부터 조직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철저한 '회피' 전략을 구사한다. 특정 1인이나 상급기관이 기금 운용을 좌지우지 못하도록 조직 의사 결정기구를 2,3중의 위원회 형태로 만드는 것은 기본이다.
기금 조직에 몸담는 동안 골프채는 아예 잡을 생각을 말아야 한다. 이해관계로 얽힐 사이는 한끼 식사조차 꺼린다. 이래놓고 어떻게 실력있는 위탁운용사를 발굴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부행동규범이 엄격하고 답답하다.
하일라이트는 투자 원칙이다. 여기서의 원칙은 '내부운용지침'과 같은 공식적인 것이 아닌, 기자가 오랫동안 국민연금 기금조직을 지켜보면서 알아차린 것이다. 이 중 가장 확신가는 원칙은 불행히도 '국민연금은 절대 최선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내부자들로서는 동의하지 않으려 들겠지만, 이들 조직은 '논란이 내재한 최선'과 '무난한 차선' 사이 선택 상황이 주어지면 십중팔구 후자를 택한다. 가령 외국 사모펀드(PEF)에 위탁할 경우, 국민연금은 상대적으로 명성이 높고 규모 큰 운용사를 선정한다. 작지만 더 실력있는 운용사들이 분명 있겠지만 선택받기 어렵다.
오랜 생존전략의 고민 때문인지 국민연금은 아무리 최선이어도 논란이 될 만한 선택을 하기 꺼려한다. 이슈메이커 되기를 싫어하며, 시장을 움직일 힘이 있지만 시장에 영향을 주는 운용을 하려 들지 않는다. 스스로 최선이라 판단해도 '왜 그런 이름없는 운용사를 선택했는지' 해명해야 할 개연성이 있다면 그런 선택은 피하고 본다. 투서도 많고, 음해도 많은 게 그 바닥이다.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당시 국민연금으로선 선택을 강요당하게 된 상황 자체를 곤혹스러워 했을 것이다. 뭘 선택하든 논란을 피하긴 어려운 상황인데, 국민연금으로선 '그래도 논란이 덜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선택이 검찰이 들어닥칠 정도로 이슈가 될 것이란 걸 당시에 누가 알았겠는가.
당시를 떠올려 보라. 국내 대부분의 언론들은 행동주의펀드 '엘리엇'의 합병 반대를 투기적인 헤지펀드의 준동으로 규정하고, 기관 투자가들이 나서 엘리엇의 준동을 물리쳐야 한다고 독려했다. 법원은 엘리엇이 제기한 삼성물산 자사주 매각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합병 찬성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실제 불법적인 뭔가가 있었다면 당연히 사실관계를 가려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합병 찬성 자체를 국민연금 기금조직의 부정한 선택으로 몰아가는 것은 잘못이다. 외압이나 청탁이 있었고, 합병을 찬성했더라도 그 외압이나 청탁은 미수에 그쳤을 수 있다. 그 선택이 부정하거나 불법한 것이라면 그 전에 공권력이 막았어야 했다.
국민연금이 차선을 택하게 한 것이라면 그런 여론을 주도한 지도층과 언론의 책임도 크다. 기금 수장 자리를 3년짜리 정권의 전리품으로 전락시켜놓고 외압에 초연할 것을 바란다거나, 수십년을 내다보고 운용돼야 할 기금을 때마다 불러 단기성과로 질책하는 국회와 감사원, 이에 맞장구 치는 전문성 없는 언론들이 모두 국민연금을 차선을 택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주연들이다. 어디 국민연금 뿐인가. 정부의 외화자금을 운용하는 한국투자공사(KIC)와 각종 직능별 연기금 공제회들 사정 역시 마찬가지다.
발단이 무엇이든 결론은 국민연금 기금조직의 독립성 확보가 되어야 하리라 본다. 어떤 외압에도 흔들림 없이 '최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자기주도적' 운용이 보장돼야 한다. 그런 후에라야 비로소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를 물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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