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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bell interview]"백만장자도 50장 분기 리포트 밑줄 쳐가며 공부"김일영 전 DZSI 사장 "경영진이 이사회에서 긴장해야…이사회 인식 개선 필요"

이돈섭 기자공개 2025-03-19 08:13:29

이 기사는 2025년 03월 14일 13시53분 THE BOARD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우리나라 기업 이사회는 지금 어떤 수준에 와 있을까. 지난 12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한 카페에서 김일영 전 다산존솔루션즈(이하 DZSI) 대표를 만났다. 국내외 내로라하는 다양한 기업을 오가며 누구보다 경영 경험이 풍부한 김 전 대표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로서의 이사회를 강조하면서 '경영진을 긴장하게 만드는 이사회'가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우리 기업인들이 이사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따져볼 일이다.

1956년생인 김 전 대표는 학창 시절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 전자공학과를 졸업, 1982년 브리티시텔레콤(이하 BT)에 입사해 30년 가까이 근무하며 인수·합병(M&A)을 비롯해 신사업 발굴 등 다양한 업무를 거쳤다. BT 최고기술책임자(CTO)를 거쳐 2009년 KT에 합류한 뒤에는 사장으로 승진해 BC카드 인수와 KT에스테이트 설립 등을 직접 주도했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는 미국 나스닥 상장사 DZSI의 대표이사로 일했다.

그가 국내외 기업에서 경험한 이사회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DZSI 재직 시절 김 전 대표는 이사회 참석에 적잖은 부담을 느꼈다. DZSI의 모태는 캘리포니아주 소재 통신장비 기업 존테크놀로지(Zhone Technologies). 인터넷 인프라 시장 확대를 도모하던 다산네트웍스가 존테크놀로지 신주를 인수했고 남민우 다산그룹 회장은 김 전 KT 사장에게 경영을 맡겼다. DZSI 이사회는 다산네트웍스와 존테크놀로지가 함께 구성했다.

기존 존테크놀로지 측 이사회 멤버는 쟁쟁했다. 리차드 크람리치(Richard Kramich) 사외이사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인텔과 애플을 발굴한 투자자로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 대부로도 일컬어지는 그는 존테크놀로지 초기 투자자였다. 당시 이미 백만장자 반열에 올라와 있던 그는 2017년 DZSI를 떠났지만 사외이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50여 장에 달하는 분기 리포트를 직접 밑줄을 쳐가며 꼼꼼히 읽은 후 갖가지 질문을 준비해 오곤 했다.

[사진=이돈섭 기자]
여기에 본인 스스로 DZSI을 도와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까지 갖고 있다보니 어떨 땐 대표인 자신보다 사업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단다. 크람리치 사외이사의 전공 분야인 인수·합병(M&A) 이슈가 안건으로 올라왔을 땐 시장 적정가치 책정 방식에 대해 난상 토론이 펼쳐지기도 했다. 나중에 M&A에 문제 소지가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일반 주주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최악의 경우 개인 재산이 축날 수 있다.

이사회 참석 자체가 가끔은 부담스러웠지만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 이사회 결의를 거친 안건에 대해선 그만큼 확신을 가질 수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김 전 대표는 "우리나라 기업 이사회와 미국과 유럽 등 소위 선진국 이사회를 비교했을 때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이사회의 질"이라며 "기업 이사회 질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는 경영진이 이사회에서 얼마나 긴장하는가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KT 사장 재직 당시는 달랐다. 우리나라 대표 소유분산 기업으로 이사회 경영이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 KT이지만, 김 전 대표는 당시 이사회 경영에 박한 평가를 내렸다. 전·현직 법조인과 공무원, 교수 출신 사외이사는 정부 상대로 허가를 받거나 소통 창구를 뚫을 때 도움이 되긴 했지만, 김 전 대표 경영 판단을 도와주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KT를 둘러싼 정치적 외풍은 향후 김 전 대표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김 전 대표는 "주식회사에 법으로 이사회를 만들어 놓으라고 하니까 이사회를 구축한 것이지, 당시 이사회가 나를 긴장하게 만들진 않았다"면서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은 오랜 기간 자본주의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체계적으로 구축됐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자본주의 역사가 비교적 짧다 보니 이사회 경영에 대한 이해도도 낮았다"고 회고했다. 일부 지분만으로 오너십을 유지하는 작금의 상황만 봐도 아직 갈 길은 멀다는 생각이다.

2020년 은퇴한 그는 이제 국내외 기업 사외이사와 고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셀레스트라헬스(Celestra Health)와 프랑스의 바이오센서스(Biosensors) 등 해외 헬스케어 기업 사외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국내 소프트웨어 기업 애니포인트미디어에서 고문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최근 한 스타트업 기업 비대면 이사회에서는 신규 거래처에서 무리한 요구를 받아 고민하던 경영진과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찾기도 했다.

김 전 대표는 "기업이 상장을 한다는 것은 동업자를 구했다는 뜻이고 나 혼자 사업을 꾸리는 것이 아니면 동업자 의견을 물어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미국과 영국 등에선 기업 하나를 성공시키기 위해 다양한 전문가들로 이사회를 꾸리고 그 전문가들 의견을 경청해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토론을 통해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해외 기관의 국내 기업 인수 딜에 참여하곤 하는데, 외국 투자자가 국내 기업에 바라는 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난해 국내외 헬스케어 기업 투자에 주력하는 프랑스 사모펀드 운용사 아키메드(Archimed) 그룹이 국내 헬스케어 상장사 제이시스메디칼을 인수할 때 해당 딜을 직접 드라이브한 인물이 바로 김 전 대표였다. 아키메드를 주인으로 맞은 제이시스메디칼은 상장 폐지 절차를 밟았다.

최근 자본시장 안팎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상법 개정안도 의미있는 한 걸음이라고 평가했다. 해외 상장사는 모든 주주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실적 성장 위주의 기업 경영보다는 자기자본이익률(ROE) 성장 위주의 경영 전략을 펼치는데, 그 패러다임 전환의 주춤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김 전 대표는 "기업 성장은 그 사회 자본시장 발전 수준과 궤를 같이 하기 마련"이라면서 "인식의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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