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삼성물산 합병 찬성 "정서적 판단 배제" 소송 가능성 등 고려 '의결권 행사지침' 엄격 준수… 사법부 판단만 근거 활용
정호창 기자공개 2015-07-17 08:29:00
이 기사는 2015년 07월 16일 09:4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안 승인의 키를 쥔 국민연금이 찬성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의사결정 배경에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일각에서 국내 기업 보호와 국부 유출 예방 등을 고려한 결정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으나, 금융투자업계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철저히 '의결권 행사지침'을 준수해 의사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이번 결정에 대해 훗날 소송이나 각종 감사 청구 등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리스크가 큰 정치적·정서적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오직 관련 규정에 입각해 사법부 판단 등 명확하고 구속력 있는 근거만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과 같은 공공기관은 모든 업무를 법과 규정에 따라 수행하도록 해 있다"며 "투자위원회에서 국민연금의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한 논의가 오갔을 수는 있지만 최종 판단은 철저히 '의결권 행사지침'에 따라 이뤄졌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안에 찬성표를 던지기로 내부방침을 정하고도 비공개 입장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는 점 역시 투자위원회가 '의결권 행사지침'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방증"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지침 제10조는 상장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내역을 주주총회 이후 공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지침 제6조에 규정된 세 가지 기본원칙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돼 있다. △주주가치의 감소를 초래하지 않고 기금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경우 '찬성' △ 주주가치의 감소를 초래하거나 기금의 이익에 반하는 안건은 '반대' △찬성/반대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엔 '중립' 또는 '기권' 할 수 있다.
이 같은 원칙을 뜯어보면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질 수 있는 조건이 반대표를 행사할 때보다 까다롭게 규정된 점이 눈에 띈다. 반대표는 주주가치 감소나 기금 이익 훼손 중 하나만 해당돼도 행사할 수 있지만, 찬성표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문제 없이 충족해야 행사가 가능하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안건에 대입하면 기금 이익에 반하는지 여부는 쉽게 판단이 가능하다. 두 회사의 합병안이 발표된 직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주가가 모두 상한가를 기록하는 등 시장 반응이 긍정적으로 나타났고, 증권가 애널리스트 대부분이 향후 합병 법인의 주가 상승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합병이 기금 이익에 반한다고 보기 어려운 셈이다.
따라서 이번 사안에 대한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은 주주가치 감소 여부가 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주주가치의 감소를 초래한다는 명백한 근거가 제시된다면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지침상 결코 합병안건에 찬성표를 던질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금융투자업계 전문가들은 국민연금 투자위원회가 사법부의 판단을 객관적이고 구속력 있는 근거로 인정해 이번 합병이 주주가치 감소와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이번 합병에 대해 자산 기준으로 볼 때 합병비율이 삼성물산의 주주가치 감소를 초래하도록 불공정하게 결정돼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국내 법원에 주총 결의를 금지해달라는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ISS 등도 자산가치를 기준으로 밸류에이션을 분석해 엘리엇과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가처분 소송을 맡은 국내 법원은 명백하고 단호하게 합병비율에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자본시장법상 상장회사의 합병비율은 주가에 따라 결정되며, 공개시장에서 형성된 주가는 시세조정이나 부정거래 등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일정 시점의 기업가치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반영하므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은 불공정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국내 법이 상장법인의 합병비율을 주가를 기준으로 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이에 대해 사법부가 공정성에 문제 없다는 판단을 내린 만큼 국민연금 입장에선 주주가치 감소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엘리엇이나 ISS 등이 합병 반대 근거로 내세우는 자산 기준 계산법은 기업가치를 분석하는 여러 접근법 중 하나일 뿐"이라며 "국내 법상 허용되지 않는 방법인데다 공신력을 인정받는 절대기준도 아닌데 이를 근거로 합병 반대 결정을 내릴 경우 국민연금 입장에선 논리적 약점을 안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합병 찬성 진영이 반발해 향후 소송 등으로 국민연금을 공격할 경우 방어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번 합병을 놓고 찬·반 양쪽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어 주총서 패배하는 쪽은 향후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결정을 문제 삼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국민연금 투자위원회가 이를 모를 리 없기 때문에 향후 소송이나 감사 등을 고려해 가장 리스크가 적은 방법과 절차, 근거 등을 선택해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그는 "ISS 등 자문사의 분석과 권고는 강제성이 없는데다 국내 법과 배치되는 부분 때문에 향후 법적 공방이 벌어질 경우 객관성 있는 근거로 인정받기 어려워 국민연금이 합병 반대 논리로 채택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국민연금이 합병 찬성 방침을 정한 것은 국내 기업의 백기사가 되겠다는 거창한 이유 등이 아니라 현 시점에서 안심하고 활용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구속력 있는 근거가 사법부 판단밖에 없어 이를 토대로 내부 '의결권 행사지침'을 충실히 따라 나온 결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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