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에너지 재무정책 이번엔 달라질까 단기금융 편중·유동성 리스크 노출.."은행의존적 재무정책 탈피해야"
이 기사는 2010년 06월 22일 18:3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바젤Ⅲ에서 무역금융이 은행의 잠재적인 유동성 리스크 요인으로 인식됨에 따라, 수출입 기업의 재무정책에 변화가 있을지 주목된다. 특히 그 동안 원유 수입을 위해 내국수입유산스(usance) 등 단기금융을 주로 이용해온 정유업체의 자금조달 패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유산스의 덫
국내 1위 정유업체인 SK에너지는 원유 도입 과정에서 단기금융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총차입금의 절반 정도가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성차입금(내국수입유산스+매출채권할인)이며, 내국수입유산스 활용도가 높은 편이다.
내국수입유산스는 어음기한까지 수입상품을 팔아 그 회수대금으로 어음대금을 결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편리한 금융수단이다. 은행의 신용공여 덕분에 수입업체는 어음 결제까지 시간적 여유를 벌 수 있다. 장기대출이나 회사채에 비해 조달금리도 낮아 비용 면에서도 유리하다.
은행 입장에서도 유산스 같은 무역금융 상품은 자동결제성 자금으로 결제불이행 위험이 낮아 우발 채무로 분류된다. 그 만큼 자본적립 부담에서도 자유롭다.
하지만 신용경색 상황이 오면 문제가 달라진다. 은행 입장에서 유산스를 자동으로 연장해주기 어려워지고 차주의 유동성에 여유가 없다면, 결제불이행 위험까지 발생할 수 있다.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가 작년 말 발표한 '자본 및 유동성 규제 개편안'에서 무역금융상품을 유동성 유출 위험이 큰 상품으로 분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2008년 하반기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국내 은행의 단기 외화조달이 막히자 유산스의 위험성은 현실이 됐다.
2007년 말 1조원이던 SK에너지의 유산스 차입금은 2008년 3분기 2조4447억원으로 불어났다. 하지만 신용경색 사태로 은행이 유산스 연장을 꺼리자, 부랴부랴 1조원이 넘는 기업어음(CP)을 발행하고 이를 달러로 바꿔 급한 불을 껐다. 단기성차입금 비중이 50%에 육박했던 상황에서, CP 발행마저 막히고 한미 통화스왑에 따른 무역금융 자금지원이 없었다면 결제불이행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다.
한 크레딧 애널리스트는 "미국 기업의 경우 총차입금에서 단기차입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10% 대를 넘지 않는다"면서 "국내 최대 정유업체가 은행에 (환리스크와 유동성 리스크 관리를) 의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 위기 교훈 잊은 SK의 재무정책
은행에 기대는 SK에너지의 재무정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SK에너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SK주식회사 역시 과거 유동성 리스크에 무방비로 노출됐었다.
SK글로벌 사태가 진행 중이던 2003년 SK㈜의 총차입금 대비 단기성차입금 비중은 70%에 달했다. 당시 SK㈜는 채권은행들이 유산스 한도를 줄이자 유동성 위기에 직면했고, 원유도입이 어려워져 석유공사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유산스를 안정적인 자금운용 수단으로 생각했다가, 유산스의 덫에 빠졌던 셈이다.
위기를 통해 유산스의 위험성을 몸으로 체감했던 SK그룹이지만, 재무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2007년 SK㈜에서 분리된 SK에너지의 단기성차입금 비중은 여전히 50%에 가깝다.
물론 이 같은 단기금융 의존적 재무정책은 SK에너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올 4월 현재 무역금융(매입외환+내국수입유산스)에서 국내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74.0%에 달한다. 그렇지만 국내 최대 정유업체면서 AA+의 최상위 신용등급을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이 환리스크와 유동성 리스크를 은행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SK에너지보다 신용등급이 한 등급 높은 포스코의 단기성차입금 비중이 10%대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 시사적이다. 단기성차입금에서 현금성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SK에너지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국내 정유업체들은 대부분 원유도입을 위해 내국수입유산스를 이용하고 있다"면서 "2008년말 금융위기 상황에서 유동성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CP를 발행해 원유도입 자금을 조달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대기업이 (자신의 환리스크와 유동성리스크를) 자본시장에 전가한 셈"이라며 "조달비용 문제가 있긴 하지만 기업이 직접 외화채권을 발행한다면 자금의 안정성을 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위기를 통해 새삼 드러났지만 은행의 외화유동성 문제는 국가적인 리스크"라면서 "금융위기 동안 외화조달이 막히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유산스를) 연장했는데, 앞으로는 개별 기업 차원에서의 외화유동성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국내 현실에서 모든 기업에게 무역금융 의존도를 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높은 신용등급을 보유한 대기업까지 유동성 위험을 금융시장에 전가시키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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