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4년 06월 03일 07:5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순간의 인상이 꽤 오래 감정을 좌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직업 특성상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다. 주는 것 없어도 정이 가는 사람, 주는 게 많아도 영 별로인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4'에서 이제 막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한 두산그룹 오너 5세와 꽤 긴 대화를 나눴다. 언론을 통해 얼굴이 알려진 지 갓 두어 달. 훗날 듣기론 혹시 알아보는 기자가 있을까 미리 아침에 잠깐 사전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교육의 힘일까. 인생 첫 기자와의 대화라는데 생각 이상으로 바르고 겸손한 모습에 속으로 살짝 놀랐다. 농담처럼 건넸지만 진담이 꽤 섞인 '파이팅'을 빌어주곤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박정원 회장과 박지원 부회장을 비롯해 두산그룹 오너 네 명을 한자리에서 봤다. 형이 기자들 앞에서 말하는 동안 두어 걸음 뒤에서 묵묵히 기다리는 동생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림이 좀 어색해 생각해보니 사이가 아예 불편해서, 혹은 굳이 나쁘지 않더라도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형제가 함께 공식석상에 서는 일 자체가 재계에선 보기 드물었다. '위계가 확실한 걸 보니 (다른 곳처럼) 싸울 일은 당분간 없겠군.' 순간 떠오른 현실적 감상이다.
다섯 달이 된 지금 그때의 일이 떠오른 건 최근 두산그룹의 분위기가 오랜만에 활기차기 때문이다.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게 바로 지주사 ㈜두산의 주가다. 채권단 관리 체제가 시작된 2020년 3월 2만5000원대까지 떨어졌으나 최근 20만원도 넘겼다.
이유 없이 오르고 영문 모르게 떨어지는 게 주가라지만 ㈜두산의 경우 이유가 어느 정도 명확하다. 잘 짜인 계열사 포트폴리오가 좋은 타이밍을 만난 결과다. 앞으로 어느 정도 조정은 거치겠지만 투자자들의 기대를 업고 기세를 탄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당연히 우연은 아니다. 원전에서 수소, 반도체, 로보틱스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포트폴리오는 지난 몇 년의 구조조정을 겪으며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사업들이다. 몇 년 전 "10년 뒤 가장 궁금한 그룹이 어디냐"는 질문에 누군가 '두산'이라고 대답하자 다들 의아한 시선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 와선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실 위기 극복을 이끈 리더라 하면 흔히들 카리스마가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두산그룹 오너들은 그보다는 다소 차분하고 조용한 쪽이었는데 기업을 경영하는데 강력한 카리스마가 꼭 필요한 덕목은 아닌 듯 싶다. 사람 몇몇을 보고 기업, 나아가 그룹의 미래를 낙관하는 게 다소 '오버'스럽기도 하겠지만 결국 기업도, 그룹도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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