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사로잡은 예술]"예술이 전한 영감, 도전적인 기업경영의 원천"서창우 한국파파존스 회장을 사로잡은 미술, 이반·다브론 무힛디노프·김창열
서은내 기자공개 2024-10-30 08:30:09
[편집자주]
예술 작품에는 무한한 가치가 녹아있다. 이를 알아본 수많은 자산가, 기업가들의 삶에서도 예술은 따뜻한 벗으로서 그 역할을 해오고 있다. 더벨은 성공한 CEO들이 미술품 컬렉터로서 어떻게 미술의 가치를 향유하는지, 그의 경영관, 인생관에 예술품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인터뷰를 통해 풀어봤다.
이 기사는 2024년 10월 28일 17:1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예술이 한 기업가에게 이렇게나 큰 영향을 미친 적이 있을까. 30년 이상 기업 경영에 몰두해온 서창우 한국파파존스 회장(66)에게는 예술인의 DNA가 흐른다. 그의 삶과 나아가 경영철학 곳곳에는 예술에서 받은 영감과 도전성이 스며있다. 서창우 회장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얼마나 예술에 진실된 가치를 두고 사업을 운영해왔는지 엿볼 수 있었다.서 회장은 사회공헌에 관심이 깊은 인사로 알려졌으나 그의 미술에 대한 열정은 조명되지 않았다. 서창우 회장은 종종 미술품을 구입하곤 한다. 다만 그가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은 수집 보다는 미술관행으로 기울어있다. 올해 서 회장은 현대미술관회 회장도 맡았다. 현대미술관회는 국내 대표적인 미술계 후원단체 중 하나다.
서 회장은 연세대, 미국 마이애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전형적인 기업가다. 부친인 서병식 전 동남갈포공업 회장이 일군 기업 갈포벽지에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경영자로서 그가 걸어온 행보 뒤에도 예술의 도움이 있었다. 서 회장은 어릴 적부터 미술을 공부했고 벽지 사업체 운영 당시 제품 디자인에 실질적으로 미술 기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2002년 미국의 피자브랜드를 들여온 후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서 회장은 한국파파존스 경영을 통해 도전정신을 입증해왔다. 한국파파존스의 도전정신 역시 예술에서 습득한 창의성과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한국파파존스는 2010년 260억원대를 기록한 후 10년만인 2020년 525억원으로, 지난해에는 680억원까지 성장했다.
Q. 어린시절 멕시코 올림픽 선수단에 출전해 그린 벽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미술은 기업 경영과는 결이 다른 분야다. 어떻게 미술에 빠져들게 됐나.
A. 미술을 사랑하신 부모님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미술을 접했다. 언제인지도 모를 아주 어린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항상 그림을 다 그려야 자고는 해서 빨리 자라고 야단도 맞았다. 순서를 따지자면 미술을 경영보다 먼저 접한 것 아닐까싶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재주를 활용할 기회도 많았다. 9살부터 아버지 회사(갈포벽지)에서 외국 바이어에 보내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회사의 벽지를 활용해 콜라주 카드로 만들었다. 수출용 편지봉투나 우표 도장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선수단에 선발돼 차플테펙공원에서 3×3m 벽화를 그린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고 경영자가 되는 과정에서 미술은 많은 영감과 도움을 줬다.
Q. 미국 마이애미대의 미대에서 수학하신 이력도 눈에 띈다.
A. 대학에 들어가 다시 목탄과 붓을 들었다. 데생이나 크로키 등 수업을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어 데생을 주로 배웠다. 하지만 대학 1학년은 그림만 그리기에는 내가 너무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1978년 내가 다니던 미술학원이 신문로 길이 확장 되면서 헐려 그림을 접었다. 한참 뒤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시간이 있어 1985년 미술대학을 한 학기 다닐 수 있었다.
MBA과정 중 시간이 남아 유화 수업을 들었다. 학생들의 작품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 내겐 캔버스 사이의 나무 문짝, 의자가 박혀있는 2D를 넘어가는 그림이 충격이었다. 열등감이었을까 나이 탓이었을까, 그림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미대에서는 주로 상업적인 렌더링, 염색, 위빙(weaving), 2D 디자인 등을 들었다. 재미도 있었지만 이후 부친의 벽지회사 디자인에 많은 도움이 됐다. 컴퓨터 디자인을 그때 못 배운 게 항상 아쉽다. 마이애미대학 내에 미술관이 있어 젊은 작가 전시를 자주 했고 많은 그림을 접할 수 있어 행복했다. 몇몇 전시는 지금도 생생히 생각난다.
Q. 도상봉, 박노수 화가의 그림을 보며 자랐다고 들었다. 부모님도 미술에 대한 애정이 깊으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A. 집에 걸려있던 도상봉 화백의 작품을 보며 소나무 그리는 기법과 그 밑 그림자를 연습했다. 박노수 선생의 물에 풀린 듯한 영롱한 기법을 연구하기도 하며 매일 그림을 그려갔다. 미술을 좋아하셨던 부모님을 따라 항상 전시회를 다녔다. 취미로 동양화 난을 치던 어머니 때문에 먹을 접했다. 벽지를 수출하는 아버지 덕에 다양한 물감과 색상 재료를 다룰 수 있게 됐다. 열성적인 아버지, 아버지의 직업 덕분에 재료에 국한되지 않고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상도 많이 탔다. 매스컴에도 나갔고 전시회도 열었다. 자연스럽게 국전에서 본 내 눈에 들어온 작품들, 집에 걸려있던 미술품들, 나를 가르치던 스승들의 색상과 기법을 눈여겨보면서 실력도 늘어간 듯하다.
Q. 좋아하는 작가로 국내 서양화가 이반을 포함해 르누아르, 모네, 니키 드 상팔, 루이즈 부르주아의 이름을 꼽았는데 이들의 작품은 삶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는가.
A. 이반 화백은 내게 처음 그림을 가르치신 스승이다. 그의 가르침 덕에 내 자신의 그림을 그렸고 나만의 정신세계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그리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나만의 세계를 그림에 담게 했다. 중학교 3학년 재학시 고등학교 입시시험이 없어졌다. 어머니를 따라 인사동 갤러리를 다녔다. 스승의 화실이 삼청동에 있어 자주 놀러 갔다. 찢어지고 뚫어지는 <팽창력>이란 그림을 준비하고 계셨다. 내게 또 다른 세상이었다.
5학년때 미술책에서 거장들의 그림을 보게 됐다. 특히 루소의 그림 그리는 방법, 르누아르 색의 조합과 붓의 터치는 나를 밤새우게 했다. 니키 드 상팔과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보면서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그 상상력이 부러웠다. 니키 드 상팔은 내가 아는 한 미술의 기본기 없이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 더 찬사를 보낸다. 내 눈에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그 그림에 흥취하곤 한다. 이같은 '도전성'에 대한 갈망이 지금까지도 항상 내가 새로움에 도전하게 하는 바탕이 된 것 같다.
Q. 예술의 향유는 기업 경영에도 영향을 줬을 듯 하다.
A. 나는 거의 태어날 무렵부터 그림을 접했고 그림들은 내 삶에 엄청난 영향을 줬다. 여러 회사를 경영해오면서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됐다. 나와 같은 경험을 갖고 느끼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회사 일이 훨씬 효율적으로 진행되고 더 멋진 결과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림을 많이 접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그림의 영향력은 크리라 생각한다. 발달장애인의 그림을 산 적이 있다. 보는 이의 마음까지 흐뭇하게 만드는 그림이었다. 천진하고 해맑은 생각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또 어떤 이는 그림을 보면서 감동 평안 위안을 느낀다. 내가 좋아했던 작품들은 매번 내게 새로운 작품들이었다. 그 새로움에 감탄했다.
Q. 첫 미술품 소장 스토리가 궁금하다. 그 작품의 매력은 무엇이었나.
A. 출장을 다니다 보면 하루 이틀 비는 시간이 생긴다. 어느 도시에 가든 꼭 미술관과 갤러리를 들리려 했다. 내 시각을 현 시점의 수준에 맞춰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다. 1980년 말 중국 항주 출장 때 샹그릴라호텔에 자주 묵었다. 샹그릴라호텔 잡지로 기억한다. 잡지에서 본 수채화에 이끌려 수소문해서 구매했다. 물론 전에도 부모님께서 전시회에 데려가 내게 고르라고 하셔서 산 작품들도 있으나 이 중국 작품이 내 돈으로 산 첫 작품이었던 것 같다. 지금 이 작품은 아버님 사무실 벽에 걸려있다. 언제 봐도 마음에 드는, 빨려 들어가는 작품이다. 마치 내가 그림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Q. 종종 작품을 구입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소장 작품의 특징이 있다면.
A. 난 미술품 컬렉터라고 하기보단 미술관에 직접 가는 타입이다. 마이애미대학 미술대학 내에 미술관이 있어 젊은 작가의 전시를 자주 접하면서 그림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하거나 남들이 좋아해서가 아니라, 나를 기분 좋게 하고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그림을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웬만한 그림은 미술관에서 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Q. 애정하는 소장품에는 어떤 작품이 있나.
A. 출장차 우즈베키스탄 항공(Uzbekistan Airways)을 탄 적이 있었다. 모닝캄 같은 기내잡지에서 내 눈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중국 항주에서 그림을 샀을 때처럼 아는 지인한테 부탁을 했지만 그 그림을 구할 수 없었다. 3~4년이 지났을 무렵 부모님을 모시고 우즈베키스탄 우르겐치에 갔다. 그곳 미술관에 들렀더니 관장이 내가 찾던 화가의 제자라 우연히 연결이 되었다. 다브론 무힛디노프(Davron Mukhitdinov)란 화가다. 파킨슨병에 걸려 3~4년간 집에만 계셨고 연결이 안됐던 것이다. 그의 집에 화실이 있었는데 내가 찾던 바로 그 그림이 있었다. 바로 사서 들고와 지금 내 사무실에 있다. 원래 풍경 화가로 유명하신 분이다. 내 눈을 사로잡는 미스틱한 신비로움을 주는 작품들이 있었다. 아프지만 않으시면 한국에 모셔와 전시회를 열어드리고 싶었다. 지금도 그의 작품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비로움을 느낀다.
두번째는 이반 선생의 작품들이다. 그는 1960년대에 주로 형이상학적인 작품을 그렸고 1970년대 들어선 주로 '팽창' '뚫림' 이런 작품들을 그렸다. 비록 중학생이었지만 작품에서 폭발하는, 뛰쳐나가는, 외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물어보니 맞다고 하셨다. 스승의 과거사를 알게 되고 이해하며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하는 이반 화백의 그림을 더 좋아하게 됐다. 이 그림은 이전에 그리셨던 <모닝 판타지(Morning Fantasy)> 처럼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물론 이반 화백에게는 본인의 울분을 폭발시키시는 작품이었으나 사람들이 꼭 힘들 때에만 가슴이 터지는 느낌을 느끼는 건 아니다. 뭔가 성취했을 때나 기쁠 때, 멋진 것을 봤을 때에도 가슴이 터지는 느낌을 갖는다. 이반 선생의 <팽창력>이 내 최애 작품이다. 세번째는 김창열 화가의 <물방울>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 영롱한 물방울에 빠졌었다. 자신만의 물방울을 세계적으로 만드신 분 아닌가.
Q. 기업가들의 미술계를 향한 진심 어린 후원은 작가 양성과 미술산업 전반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현대미술관회 회장으로서 미술계 후원에 어떤 뜻을 두고 있는가.
A. 국립현대미술관을 후원하는 현대미술관회라는 오래된 후원조직이 있다. 과거 과천 미술관을 다니며 미술 강의, 그림을 가르치는 수업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원하는 강의가 있을 때마다 동물원 옆 미술관에 다녔다. 현대미술관회 30주년 행사를 아내와 딸과 함께 돕기도했다. 당시 미술관에서 준비했던 만찬은 모두를 즐겁게 했다. 지금도 미국, 독일, 프랑스에서 미술관에서 하는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난다. 베르사유궁이나 파리의 그랑 빨래 같은 화려함은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 미술관에서 식사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한다. 부족하지만 올해부터 현대미술관회 회장을 맡게됐다. 어떻게해야 회원들과 미술관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그동안 이곳에서 그림을 배우고 화가가 된 분이 많은 것으로 알고있다. 그 중 한 작가의 전시회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전공이 국문학인 분인데, 내가 벽지를 만들 때 고민하면서 만들었던 플렉소 기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 그의 스토리텔링이 나를 압도했다. 이날 내가 산 작품의 이름은 <합창>이다. 베토벤 9번 교향곡의 그 '합창'이다. 여러 앵무새가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는 박선미 화가의 <합창>은 우리 회사 직원들이 각자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해 회사를 조화롭게 만들어가자는 내 생각과 맞아떨어져 회사 입구에 걸어뒀다.
현대미술관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제는 과거와 달리 많은 곳에서 그림과 건축, 인문학을 배울 수 있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기증품으로 인해 우리 현대미술관이 풍성해졌다. 더 많은 국민들이 좋은 작품을 볼 수 있도록 국립현대미술관을 안팎으로 돕는 것이 5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현대미술관회의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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