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8년 02월 14일 08:1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미국이) 위대했던 적이 있었지. 옳은 것을 위해서 일어섰고 도덕을 위해서 투쟁했지. 도덕적인 이유로 법을 제정하기도 폐지하기도 했었지. 가난을 물리치려고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싸운 건 아니야. 희생도 하고, 이웃을 걱정했지. 신념을 위해서 돈을 모금했지만 그런 걸로 자랑 따위는 하지 않았어. 위대한 것들을 이뤘지. 엄청난 과학적 발전도 이뤘고 우주를 탐사하고 질병을 치료했어. 세계적인 예술가들도 길러냈고 세계 최고의 경제도 이룩했어. 우린 별을 향해 전진했지. 인간답게 행동했고 우리는 지성을 열망했지 우습게 여기지 않았어. 그렇다고 열등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니거든. 지난 선거에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그런 걸로 자신을 평가하지도 않았어. 쉽게 겁을 먹지도 않았고.... 우리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에게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지. 위대하고 존경받는 사람들의 지식.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가장 첫번째 단계는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거야."미국 HBO 드라마 걸작 '뉴스룸' 시즌1의 너무도 유명한 장면이다. 한 대학 토론장에서 패널로 초대된 검사 출신 뉴스 앵커 윌 맥커보이. 청중 속 한 어린 여대생이 던진 '미국이 왜 위대한 나라인가'란 질문에 냉소적으로 회피하던 중, 토론 사회자의 집요한 답변 요구에 정색하며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일갈한다.
특히 '위대했던 적이 있었지'로 시작하는 윌의 답변 후반부는 뭉클함마저 느끼게 한다. 격정적 토로 뒤에 읊조리듯 내뱉는 내레이션 속엔 국가에 대한 자긍심, 선구자들에 대한 존경심과 향수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복잡하고 부조리한 미국 정치 현실을 꼬집으며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국뽕' 류의 묵직한 메시지를 이리도 자연스럽게, 그것도 TV 안방 드라마로 볼 수 있단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KDB산업은행. 한때 대단했던 곳이다. 급여가 높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 '신의 직장'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 명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IMF 구제금융 직후 국가 경제를 떠받쳐오던 국내 수출 대기업들이 외환 위기로 줄줄이 도산하던 시절 얘기다. 천문학적 규모의 기업대출들이 모조리 부도나면서 국내 시중은행들도 버틸 재간은 없었다. 도무지 출구를 찾을 수 없었던 위기의 와중에 그래도 산업은행은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였다.
도산으로 자칫 공중분해될 수도, 난리 와중에 잭팟을 찾아 몰려든 외국 벌처펀드들에 빨려들어 갈수도 있었던 수많은 국내 기업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산업은행이 씌워준 산소호흡기 덕분에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국민들이 장롱 속 금가락지까지 모아서 준 피같은 공적자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KDB 사람들은 불타오르는 사명감에 밤낮없이 일했다. 그 시절을 함께 했던 KDB 사람들은 지금도 만나면 "그땐 대단했었지" 하며 그 때의 열정과 기억을 나누곤 한다.
KDB의 대단함이 사그러들기 시작한 지가 정확히 언제쯤인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민영화의 소용돌이가 불어닥쳤었고, 그 와중에 IMF 시절에 버금갈 정도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차례 벌어졌다. KDB의 산소호흡기를 다시 빌릴 수 밖에 없었던 기업들이 다시 늘기 시작했지만, 예전같지가 않단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한때 글로벌 넘버원 조선회사로서의 명성을 누렸던 대우조선해양이 회계부정과 각종 비리에 피멍 들며 천문학적 부실을 깔고 앉아있다. 역시 한때 시공순위 1,2위를 다투던 대우건설이 쪼그라든 외형이나마 새 주인을 찾아보려 했지만, 뒤늦게 드러난 해외부실에 발목을 잡히는 일이 최근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 두 기업 모두 KDB가 수년째 관리해 오고 있는 곳들이다.
이들 기업이 KDB의 막대한 지원에도 정상화되지 못한 게 업황 부진 때문만은 아니다. 몇번의 정권 교체 와중에 KDB 사람들의 사명감과 자부심은 점차 퇴색돼 갔고, 관리 기업들을 두고 사방에서 날아오는 인사 청탁과 이권 개입에 자포자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믿지못할 얘기도 들렸다. 물론 외부 탓만 할 일은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번째 단계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이라 했던가. 이런 와중에 전후맥락도 없이 "우량 건설사를 특정지역 기반 기업에 넘기려는 시도고, 이건 특혜"라는 정치권 주장이 있었다. 여기에 언론들도 한술 거들며 "새우가 고래를 삼키려 한다"고 일제히 헤드라인을 뽑기까지 했다.
이런 일련의 헤프닝들을 목격하고 있자니 우리는 과연 언제쯤 위대한 시절을 살아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까지 하다. '위대한 것들을 이뤄내고 별을 향해 전진할' 그날이 우리에겐 언제쯤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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